[조효제] 인권이 국력이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9-19 15:04 조회29,52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코스타리카 외교가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이들은 국내에서 인권을 지향하면서 대외적으로도 그것을 추구한다. 지난 5월 국제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대통령궁에서 국기와 무지개 색깔의 게이 깃발을 함께 게양할 정도였다. 그것도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메시지를 던지려는 의도에서였다.
한 나라의 힘, 즉 국력을 어떻게 평가할까. 흔히 인구, 국토 면적, 경제 수준, 군사력, 과학기술 발전, 환경관리 능력 등을 꼽는다. 정량적 지표로 나타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중에서 경제력, 군사력과 같은 ‘하드파워’는 강대국 중심의 힘의 논리에 가까운 기준이다. 이른바 현실주의 이론으로 국제정치를 분석할 때 적합하다. 잘 알려진 일화가 있다. 스탈린의 통역관으로 일했던 발렌틴 베레시코프의 회고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영국의 처칠과 소련의 스탈린이 만났다. 처칠이 설교를 시작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나면 연합국인 미, 영, 소가 세계를 좌우하게 될 터인데, 그러려면 민주국가라는 점을 보일 필요가 있고 특히 이웃나라와 잘 지낸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소련은 폴란드한테 잘해줘야 한다. 폴란드는 가톨릭 국가이니 그래야 바티칸 교황청과도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이 처칠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로마 교황은 휘하에 몇개 사단이 있는가.” 고매한 천상의 논리를 설파하던 처칠을 스탈린이 지상으로 끌어내린 순간이었다. 스탈린의 국제관계 인식이 바로 전형적인 현실주의라 할 수 있다. 표현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국제정치를 치열한 국익 추구의 장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학계도 그렇지만 외교 현장에선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선린우호니 세계평화니 하는 이상을 국제정치에서 실제로 추구하는 나라가 있기나 한 것인가. 이 질문에 가장 근접한 나라로 코스타리카를 꼽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성싶다. 필자는 현재 코스타리카에 와서 가르치고 있다. 남북 아메리카의 정 중간에 있는 코스타리카는 전통적인 기준으로 보아 국력이 큰 나라가 결코 아니다. 인구 470만에 우리나라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한 사이즈의 소국. 국내총생산(GDP)은 530억달러로 세계 81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달러가 조금 넘는 세계 68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군사력으로 치면 군대를 아예 없앤 나라이니 그 점은 언급할 수조차 없다.(군대 폐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한번 따로 쓸 생각이다.)
이처럼 코스타리카는 통상적인 평가로 따져 크게 내세울 게 없는 곳이다. 여기 사람들이 스스로를 ‘티코’라 부르듯 겉으로만 보면 아담하고 평범한 개발도상국이다. 그런데 국제정치에서 코스타리카의 영향력을 따지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단순히 존재감이 있는 정도가 아니다. 독특한 컬러의 존재감으로 자기 입지를 확실히 굳힌 남다른 국가다.
우선 코스타리카에는 남북 아메리카 전체를 관할하는 미주인권협정에 따른 국제기구인 미주인권재판소가 있다. 1979년 설립될 때 미국과 캐나다가 서로 유치하려 했지만 결국 코스타리카로 낙착되었다. 또 이곳엔 유엔평화대학이 있다. 유엔 총회에서 조약기구로 설립한 독특한 교육기관이다. 코스타리카는 외교 수완과 주도력도 뛰어나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실을 창설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기록이 있다. 작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었고 우리나라도 서명한 무기거래조약, 이것도 코스타리카가 큰 역할을 했다. 재래식 무기의 불법적이고 무분별한 이전을 규율하는 조약인데 비준국가 수가 늘고 있어 머잖아 발효될 것이 확실하다.
중남미의 역내 외교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곤 한다. 중미를 휩쓸던 내전과 분쟁을 종식한 에스키풀라스 평화협정은 코스타리카의 중재가 없었더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의 자유선거도 지원했다. 오스카르 아리아스 전 대통령은 그 공으로 1987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코스타리카는 또한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국가들의 연합체인 리우그룹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대변국 역할을 맡고 있다. 이달 초 집속탄금지 조약에 벨리즈가 비준함으로써 중미는 세계 최초로 집속탄을 전면금지한 지역이 되었다. 이 조약 역시 코스타리카가 열심히 중재해 성사시켰다. 프린스턴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물질적 국력보다 외교적 국력이 훨씬 큰 나라가 코스타리카다.
코스타리카의 인권·평화 외교는 기존의 국제관계 이론으로 설명이 잘 안된다. 국제관계를 무정부 상태로 보고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 논리로 설명하는 현실주의 이론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유주의 제도 이론도 딱 들어맞진 않는다. 이 이론에선 작은 나라들이 국제질서의 틀 안에서 주권을 인정받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수용되기를 원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국제법과 제도의 보호 아래 모여 있는 다소 수동적인 국가들의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코스타리카는 국제적 제도들을 적극 활용하고 국제정치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것도 인권, 민주주의, 평화라는 브랜드를 통해서 말이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4년 9월 16일)
기사 전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5436.html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