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러브 어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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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3-26 14:20 조회21,6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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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남자랑 사귀고 싶다
아메리카 국경을 넘다
사막에 쓰러진 흰 셔츠 멕시코 청년
너와
결혼하고 싶다
바그다드로 가서
푸른 장미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폭탄처럼 크게 들리는 고요한 시간에
당신과
입맞춤하고 싶다
학살당한 손들이 치는
다정한 박수를 받으면서
크고 투명한 물방울 속에
우리는 함께 누워
물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은빛 물고기에게,
학살자의 나라에서도
시가 씌어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를.
-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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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Affair’는 직역하면 ‘사랑 사건’ 혹은 ‘사랑 놀음’쯤 되겠지만, 그보다는 한 영화의 제목으로 또렷이 기억되는 단어이다.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6개월 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다시 만나자고 한 약속이 예기치 않은 사고로 엇갈려 이야기의 곡절이 이어지는데 미국영화사에 수차례 리메이크된 작품이다. ‘워런 비티’ 주연 3번째 리메이크된 영화는 실제 그의 아내 ‘아네트 버닝’이 함께 나와 순백의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 시는 영화 스토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다만 이 시는 우연에 기댄 운명적인 사랑과 함께 특정 시대의 아픔을 격정적으로 자조하며 어루만지고 있다.
‘학살자의 나라에서도 시가 씌어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는 차차 고민해 보기로 하고, 여기선 다른 함의와 2차원적 은유보다는 운명적인 사랑에 대해 가벼운 생각을 펼쳐본다. 사람은 누구나 평범한 일상에 일약 활기를 불어넣어줄 영화 같은 극적인 만남과 사랑을 꿈꾼다. 실제로 영화처럼 만나서 사랑하고 그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도 없진 않을 터이나 대개는 환상이고 그저 가슴속 로망으로만 머물고 만다.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 소개팅이나 맞선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세상의 모든 남녀의 만남은 그 인연과 운명의 얼개 속에 존재한다. 습자지에 먹물이 스며들듯 서서히 번져서 운명이 되는 사랑도 있는 것이다.
2010년 SBS 신년특집으로 첫 방영된 ‘짝 찾기’란 프로그램 역시 방송사의 작위적인 연출이 개입되었지만 짝을 고르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는 충분히 운명적인 ‘러브 어페어’가 될 수 있었다. 처녀총각 12명이 일주일간 ‘애정촌’에서 함께 생활하며 짝을 찾기 위해 서로 탐색하고 경쟁했다. 하지만 난 방송을 보는 내내 불편하고 화가 났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것에서부터 닭잡기와 물속으로 뛰어들기, 밤새 무릎 꿇기 등이 선택의 기준이라니 유치해서 못 봐줄 정도였다.
아니 ‘동물의 왕국 짝짓기’보다 못한 걸 보았다는 찝찝한 느낌이 시종 가시지 않았다. 일부 남성출연자는 자업자득이겠으나 ‘찌질하다’란 손가락질에 큰 상처를 입었고, 미모가 ‘조금’ 딸려 탈락한 여성출연자로서는 외모지상주의의 높은 벽만 실감했다. 여기저기 얼굴이 팔린 바 있는 한 남성 출연자의 출연의도가 무언지 논란이 일었고, 또 여자 3호와 4호의 출연은 연예계 진출을 위한 노림수란 의혹도 따랐다. 이런 프로그램에 ‘이것이 한국인이다’란 부제를 갖다 붙이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짝’이 4년씩이나 가나 싶더니만 결국 이번 출연자 자살사건을 계기로 종을 쳤다. 참 이상한 ‘러브 어페어’가 가도 너무 오래 갔다.
진은영 시인
(대구일보, 201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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