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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문자만이 아닌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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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08-04 17:51 조회2,9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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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재판에 기대하는 것은 정의의 실현이라기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분쟁의 원만한 해결일 가능성이 높다. 정의를 대신할 만한 결말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수단의 하나가 판결문이며, 기술이 논리와 수사다.


서양의 역사에서 보면, 신의 지배라는 사슬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 인문주의 역시 문자가 중심이 되었다. 문장으로 인간을 찬미하고, 인간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글로써 자유와 권리를 부여하고, 혁명까지 가능하게 했다.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글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다른 문화권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문자와 기록의 힘이 형성되었다가, 근대화 이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었다. 헌법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런 면에서 보더라도 문자로 결론을 선언하는 재판은 신의 의도인 정의의 구현보다는 인간적 소통의 구체적 해결이다.

판결문은 문장론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독특한 장르에 속한다. 보통사람들이 읽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전문성으로 포장된 난해함에 권위가 실려 설득력을 높이는 면도 있었지만, 이제는 옛말이다.

문자는 관념을 설명하는 데 유리하다. 잘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가능해질 때까지 장황하게 얼마든지 늘려 기술할 수 있는 도구다. 그러나 길고 복잡한 설명으로 인하여 이해가 더 어려워지는 사태도 발생한다.

관념은 무엇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 필요한 인식 조건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자체로 견고한 개념의 테두리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대상이 된 사태의 본질을 파고들수록 추상적 설명밖에 할 수 없게 된다. 추상적 개념어는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 사용할 수 없을 뿐더러,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때 필요한 것이 이미지다. 이미지는 논리적 단계의 이해를 면제함으로써 문자의 설명 방식을 뛰어넘는 유효한 의미 전달의 특별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림도 하나의 언어다. 문자의 발생 기원을 추측해 보면 그림으로부터 서서히 기호로 발전했다. 그림과 같은 이미지는 설명의 간접성 때문에 소통 수단으로 사용할 경우 위험이 따르기는 하지만, 그 위험성으로 인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수학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표시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정확하게 기입한 숫자는 거짓말을 할 여지가 없다는 믿음을 주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해석기하학을 창안하면서 수학은 숫자의 나열과 조합에서 벗어나 이미지로 변신했다. 읽는 수학에서 보는 수학이 탄생했다. 그로부터 그래프가 나타났는데, 눈에 직접 대답하는 수단이었다. 수리적 관념보다 이미지를 통해 더 빠르게, 더 총체적으로, 더 정확히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한 순간의 눈길이 사색을 대신한다는 말이 있듯이, 한 번 쳐다보는 행위만으로 복잡한 전체가 구체화하여 다가오게 하는 것이 이미지의 힘이다.

판결문에 이지 리드 방식을 도입하는 시도 역시 설득력을 높이려는 적극적 태도이다. 점자 판결문은 그 확장형이다. 판결문은 우선 당사자를 위한 서면이지만, 모두를 위한 문서이기도 하다. 특수성과 일반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판결문 구실을 할 수 있다. 당사자가 발달장애인일 경우 쉬운 어휘와 짧은 문장은 물론 삽화를 동원한다. 당사자의 특수성을 고려한 세심한 배려이나, 주문까지 파괴적 형태로 만드는 데 우려를 표시하는 일반성의 시선도 적지 않다.

판결문에 주를 달기 시작한 것만 해도 처음에는 조금 이상한 형식으로 바라보았다. 사고 현장 개요를 묘사한 도면이나 증거 자체인 사진을 첨부하는 판결문은 문자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미래의 판결문 일부를 예고편으로 보는 느낌이다.

판결문은 분명히 더 달라질 필요가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종래의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이성의 요구에 따라 배제했던 판사의 감정을 슬며시 끼워 넣는 형태로 바뀌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공동 편집인법률신문

2023년 8월 4일

https://www.lawtimes.co.kr/opinion/189651?serial=189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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