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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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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4-25 17:02 조회26,6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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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들었던 일터를 떠나 새 출발을 하기에 앞서 여행을 다녀왔다. 이왕이면 사고의 원형이 형성된 시점으로 돌아가 삶을 근원에서 돌아보고 싶었기에, 대학에서 공부한 영국 작가들의 숨결을 느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온전히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은 없었다. 예기치 않은 장소가 불쑥불쑥 현재의 고민과 상념을 끌어올렸다. 윌리엄 워즈워스가 살았던 도브코티지에서도 그랬다. 그의 취향대로 자연을 그대로 살렸다는 정원과 첫 달리기에 나선 말처럼 겨울 해가 비켜간 호수 위를 지쳤던 스케이트, 대혁명 전야의 프랑스 방문에 사용한 여권 등 흥미로운 게 많았지만, 눈길은 1800년 무렵 <더 타임스> 등 신문지로 도배된 하녀방 벽에 오래 머물렀다. 200년도 더 넘게 살아남아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신문은 언론의 책무와 언론인으로서 산 지난 세월을 환기시켰다.

기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1978년은 유신체제가 막바지로 치닫던 시절이었다. 진실에 복무하는 기자를 꿈꿨지만 그 실현은 하루하루 싸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당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됐던 송건호 선생은 그 상황을 ‘언론의 무덤’이라 불렀다. 75년 자유언론 투쟁의 좌절로 한국 언론은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언론의 추락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두환 쿠데타세력은 무덤 위에서나마 진실의 싹을 틔워보려던 언론인 수백명을 거리로 내몰고, 그들과 결탁한 언론기업은 그 대가로 제 뱃속을 채웠다.

하지만 거리로 밀려났다고 진실에 복무하려는 꿈마저 버리진 않았다. 이명박 정권 때 해직된 언론인들이 <뉴스타파> 등을 만들어 진실을 전하려 애쓰듯이, 70~80년대 해직기자들도 지하 잡지를 만들며 군부독재의 추악한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꿈과 노력은 6·10항쟁을 이끈 국민의 지원을 얻어 1988년 <한겨레>라는 결실로 맺어졌다. 해직기자로 창간에 참여해 낡은 윤전기에서 찍혀 나온 첫 신문을 받아 들었을 때의 감격은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벌써 26년 전 일이다. 그 순간을 체험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노파심이 들며 2011년 런던 세계진보언론회의로 생각은 흘러간다. 당시 참가자들은 100년 이상 된 진보매체들도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정도인데, 한겨레가 수십만 독자를 거느린 신뢰도 1위 신문이 된 것은 경이라고 치하했다. 그러나 그 치하에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자칫하다간 그들의 길을 뒤따라갈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현재에 자족해서도 안 되고 자족할 수도 없다. 창간 당시 우리는 ‘오로지 국민의 입장에서 국민의 의견을 대변하는 민주 언론’이 될 것을 자임했다. 민주와 언론, 그것은 우리가 끝내 지켜내야 할 책무다. 그런데 지금 이 땅의 언론과 민주는 70~80년대에 방불할 위기에 처해 있다.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인권유린을 저질러도 제대로 단죄되지 않고 그 최고 수장이 머리 한 번 조아리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며 버틸 수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그들이 이렇게 오만할 수 있는 것은 수구언론이란 든든한 배경이 있는 탓이다. 종편까지 만들어 여론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수구언론은 집권세력과 결탁해 사익을 챙기는 대가로 그들의 비리를 눈감고 진실을 비틀어 여론을 조작한다. 진실에 눈먼 국민이 제대로 나라의 주인 노릇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데는 한겨레의 책임도 없지 않다. 창간 이래 한겨레가 불의를 감시하고 진실을 밝혀 이 시대를 올바르게 기록하려고 노력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 많은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더 많은 국민이 한겨레에 귀를 기울이게 하려는 노력은 충분하지 못했다. 우리가 더 많은 국민의 사랑을 얻는 것이 언론기업 한겨레를 넘어 이 땅의 언론과 민주를 지키는 일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언론과 민주는 한겨레 힘만으론 지킬 수 없다. 외람되게도 여전히 여러분의 애정 어린 관심과 질책을 간구하는 까닭이다. 어디에 있든지 여러분과 함께 한겨레가 민주언론의 소임을 다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권태선 논설위원
(한겨레, 201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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