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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관] '규제개혁'이라 쓰고 '기업프렌들리'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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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4-09 14:03 조회21,5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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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제로 청년 일자리를 막고 있는 것은 죄악이다.” 최근 전국에 생방송된 정부 규제개혁 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했다는 말을 듣고 우선 그 단순논리에 놀랐지만 그것이 학교 앞에 관광호텔을 지을 수 있게 해달라는 민원에 대한 답변임을 알고서는 기가 막혔다. 생방송을 듣지 못하고 보도로만 접한 탓인지 설마하니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을까 반신반의하기까지 했다. 재직하고 있는 대학이 마침 같은 재단 산하여서 덕성여중고 바로 앞에 한 대기업이 진작부터 비난여론을 무릅쓰고 소송까지 하면서 관광호텔을 지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온 것은 필자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2년 전 대법원에서 패소로 귀결된 사안임에도 대통령이 그 모든 사회적인 과정을 무시하고 심지어 대법원의 판결까지 죄악시하고 나오니까 말이다. 

철폐할 규제도 있지만, 필요한 규제도 있다  

  규제를 개혁한다는 원칙 자체가 그릇되다고 할 수는 없다.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규제는 없애거나 바꾸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규제가 생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며,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규제는 대개 독점과 같은 자본의 집중을 막고 빈부격차를 줄이고 공동체의 이익을 지키고자 하는 취지가 담겨 있다. 기득권과 부의 독점을 뒷받침하는 규제는 철폐대상인 ‘나쁜’ 규제지만,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규제는 지켜야 할 ‘착한’ 규제다.  

  일찍이 유렵의 혁명기였던 18세기말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런던]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산업의 중심지 런던의 거리를 걸으며 거기서 나쁜 규제가 사회에 던진 해악을 분노어린 어조로 노래한다. “나는 법제화된 템즈강이 흐르는 곳 근처/ 법제화된 길을 헤매고 다닌다/ 그리고 마주치는 얼굴마다에서 만난다/ 허약함의 표식, 슬픔의 표식을.”  

  ‘법제화된 템즈’와 ‘법제화된 길’이라는 표현은 과거부터 굳어진 칙령으로 강이 소수 부유층에 독점되고 길이 기성권력에 의해 통제되는 현실에 대한 시인의 통렬한 인식을 전한다. 강이나 길처럼 시민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할 곳이 칙령의 이름으로 일부의 독점물이 되고 있다면 마땅히 그 ‘규제’는 철폐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였고 블레이크가 이 시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굴뚝청소부 같은 아동의 노동착취가 사회적인 압력으로 결국 ‘규제’를 받게 되는 과정이 영국 산업화의 다른 한 측면이었다.  

  규제에 양면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사회라고해서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가령 그린벨트를 설정하는 것은 국토의 난개발을 막고 국민일반의 쾌적한 생활환경을 유지해야 하는 국가의 입장에서 필요한 규제이고, 학교 주변에 청소년에게 유해한 시설이 들어서지 못하게 막는 것도 사회의 기본적인 문화질서를 지키기 위한 올바른 규제다. 그럼에도 지난 정부는 4대강이니 하는 철지난 토목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이 그린벨트 규제를 함부로 훼손하였고, 이제 이 정부는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내세워 학교주변 유해시설 규제에 담긴 국민의 교육권을 침해하면서 대기업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규제개혁이란 이름 아래 국방도 교육도 뒷전인가  

  들리는 바로는 대통령의 ‘죄악’ 운운 발언이 있고나서 모든 정부부서에서 개혁할 규제들을 찾느라 분주한 모양인데 그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법하다. 대통령의 지침을 따른다면 ‘일자리 창출’에 방해가 되는 규제면 무엇이고 대상이 될 수 있으니 기업들이 그동안 공익적인 이유로 함부로 하지 못했던 그 제한들을 풀어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박근혜정부는 ‘규제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의 ‘기업프렌들리’ 정신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 흐름 앞에서는 국방도 교육도 뒷전이다. 전 정부가 국방상의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규제했던 롯데그룹의 초고층건물 건축을 밀어붙이기로 허가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면, 집권 1년을 갓 넘긴 이 정부는 교육환경을 짓밟음으로써 한진그룹의 숙원사업을 뒷받침하며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블레이크의 말 그대로 이 “정신이 만들어 놓은 족쇄”를 깨고 나오는 일, 그것이 이 시대 민주시민들의 과제일 것이다.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다산포럼, 2014.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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