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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정치 규제야말로 ‘암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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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4-25 16:55 조회23,6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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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적 약자는 정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사회와 시장을 무정치 상태로 놔두면 약자들은 그저 당하고 빼앗길 뿐이다. 힘이나 능력이 아닌 머릿수로 작동하는 ‘1인1표 민주주의’는 그래서 귀중한 것이다. 민주주의에선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선호와 이익도 보장될 수 있다. 그들의 요구가 정치권으로 잘 투입되면 그에 부합하는 정책과 제도가 그 산출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의 강자 횡포를 막기 위해 정치가 경제에 개입하고 조정하는 것이나,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가 분배와 재분배에 앞장서는 것 등은 모두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때 충분히 기대 가능한 일들이다. 시장과 사회에서의 포식자와 약탈자에 대한 규제는 민주정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그런데 규제가 ‘암 덩어리’란다. 그것도 민주정치의 최고위 집행자가 한 말이다. 딱할 뿐이다. 물론 나쁜 규제도 있고, 시효를 다한 규제도 있다. 그러나 사회경제영역에서 약자 보호를 위한 규제라면 그것들은 대개 ‘착한’ 규제이고, 신자유주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시효 따위가 문제될 리 없는 규제들이다. 그런데 지금도 태부족한 그 착한 규제들을 더 늘리기는커녕 줄이고 없애려는 시도들이 별 저항도 받지 않고 진행돼가는 형국이다. 그 자체, 한국 민주주의에 무언가 심각한 결함과 결핍이 있음을 의미한다.

단언컨대, 이 심각한 문제는 암 덩어리 규제가 사실은 경제가 아닌 정치영역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요구가 정치권에 투입되고 산출되는 과정의 주요 지점마다 암적 규제에 해당하는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선거제도다. 사회구성원들의 지지율에 비례하여 각 정당에 의석이 배분되는 선거제도라면 국회의 다수파는 약자의 이익을 대표하거나 중시하는 정당들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약자들의 머릿수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 경우 착한 규제는 더 많이 제공되고 더 안정적으로 발전해갈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현 선거제도는 그러한 비례성이 현저히 낮은 것이다. 지역주의와 결합한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는 지역기반이 튼튼한 거대정당 소속의 명망가들에게만 유리할 뿐이다. 여기서 지역과 인물 변수를 넘어 약자들을 위한 정책과 가치로 승부하고자 하는 정당이 유력정당으로 부상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선거제도 자체가 일종의 진입장벽이고 정치규제인 셈이다.

현행 정당법은 5개 이상의 시·도당을 가질 것과 각 시·도당의 법정 당원수가 1000명 이상일 것 등의 매우 까다로운 정당설립 요건을 명시하고 있다. 정당설립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사회변화에 부응하는 다양한 정당들의 출현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국회의석 20석 이상이라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도 거대정당의 독과점적 특권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국회 운영과 국고보조금 배분 등이 교섭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이러한 요건은 결국 소정당의 권리와 활동의 자유를 크게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종 선거에서 거대정당 우선으로 기호를 배정하는 기호순번제 역시 독과점 정당 및 그 소속 후보자의 무임승차를 허용하는 강자 편향적 제도이다.

현행 선거법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합법적 선거운동이 가능한 기간은 너무 짧게, 그리고 불법 선거운동으로 간주되는 행위의 범위는 너무 넓게 잡고 있다. 선거운동 주체에 대한 통제도 매우 엄격하고, 선거비용 규제 또한 매우 심하다. 그 외에도 선거운동 매체의 한정, 호별방문 금지, 여론조사 공표기한 설정 등에 있어 지나치게 다양하고 광범위한 규제를 둠으로써 기득권을 갖고 있는 정당과 정치인에게 유리한 선거정치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이 수많은 정치규제들을 제거 또는 완화하여 지금의 독과점적이고 배제적인 정당체제를 보다 경쟁적이고 포용적인 형태로 개혁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대표하는 가치와 정책 중심 정당들의 진입과 활동의 자유를 최대치로 보장함으로써 정치의 민의 반영도, 즉 사회구성원들의 참 선호에 대한 반응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주장을 새 정치의 핵심 내용으로 담고 있는 새정치비전위원회의 최종보고서가 널리 읽히길 바라마지 않는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경향신문, 201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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