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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민족자결권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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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5-07 15:24 조회32,3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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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사태가 도무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크림반도가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에 병합된 후에도 동부지역의 상황이 심상찮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총리는 러시아가 3차 세계대전을 획책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요즘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설전을 보고 있으면 냉전 때의 미소 대결이 떠오른다. 이런 와중에 나이지리아에선 영화 한편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비아프라 내전을 다룬 <절반의 황색 태양>이 당국에 의해 상영금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얼핏 동떨어져 보이는 두 사건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민족자결권의 문제가 그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인민의 자기결정권’(the right of people to self-determination)이다. 러시아 상원의장은 국제법상 크림반도 인민의 자결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1960년대 말 비아프라의 자결권 요구를 강압적으로 눌렀던 나이지리아는 오늘까지도 그 입장을 바꿀 의사가 한 치도 없어 보인다. 21세기에도 큰 영향을 지닌 인민 자결권 원칙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원래 자기결정권은 개인 자아의 주체적 행위를 뜻하는 철학적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서구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제, 반식민 투쟁을 벌이던 운동가들이 집단적 염원으로서 자기결정권을 적극적으로 주창하였다. 낭만주의,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사상, 사회주의 등이 이런 움직임에 영감을 주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처리 과정에서 인민 자결권이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베르사유 회의에 참석한 미국 대표단에 지도전문가, 민속학자, 인류학자들이 포함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유명한 14개 조항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인민들(10조), 발칸반도 국가들(11조), 그리고 터키 제국 내 비터키계 민족들(12조)이 “자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자유로운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그런데 반식민 투쟁을 하던 쪽에서는 신생독립, 즉 ‘대외적’ 자결권을 강조했던 데 반해, 윌슨의 원칙은 ‘대내적’ 자결권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반제 투쟁가들은 윌슨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인민의 자결권이 완전한 독립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일종의 자치를 의미하는지는 주권과 국제질서라는 면에서 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면서도 아직까지 속 시원히 풀리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유엔헌장 1조와 55조에 “인민들의 동등한 권리와 자기결정 원칙을 존중”한다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에서는 자결권이 언급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온건했던 인민 자결권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한 건 1950년대 들어서였다. 탈식민화 조류를 타고 인민의 자결권을 국제인권 기준에 포함시키자는 요구가 거세졌던 것이다. 이른바 3세대 인권인 집단적 권리가 인권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 1960년 유엔총회 결의안 1514호는 이런 추세를 공식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피식민지 영토가 주권국가로 독립할 수 있는 법적 근거로서 인민 자결권을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그 당시 탈식민운동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다. 비서구권이 국제무대에서 제국주의 비판과 반식민 해방 주장을 거리낌없이 설파하던 시절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국제인권장전의 두 기둥인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그리고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 1966년에 각각 채택되었는데 두 문헌의 1조가 똑같은 내용으로 작성되었을 정도였다. “모든 인민은 자결권을 가진다. 이 권리에 기초하여 모든 인민은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자유로이 결정하고, 또한 그들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발전을 자유로이 추구한다.” 이 구절을 음미해 보면 피지배 인민들의 탈식민 열망을 확실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탈식민의 물결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1970년대 들어서부터 신생국의 독립을 인민 자결권으로 이해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유엔총회 결의안의 톤도 조금 변했다. 반드시 주권국가로 독립하는 것만이 자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의 가장 큰 이유는 국제체제의 성격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 국제질서는 기본적으로 국가들로 이루어진 체제인데 영토주권 원칙을 무시하고 무한정 많은 숫자의 국가를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생독립국을 포함한 대다수 나라들이 탈식민 운동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기존 국가 내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극력 반대하는 모순적 태도를 취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인도가 카슈미르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고, 콩고가 카탕가를 철저히 탄압했던 것을 상기하면 된다. 냉전 시대 소련 역시 국제적으로 비동맹, 반제운동을 지원했지만 자국 내 소수민족 집단들의 독립은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서구에 대항했던 탈식민화 운동과 직접 관련 없이 분리독립한 국가의 수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방글라데시(1971), 에리트레아(1991), 동티모르(2002), 코소보(2008), 남수단(2011) 등에 불과하다. 이들은 모두 중앙정부에 의해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역사가 있고, 통상적인 정치 과정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던 경험을 지니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최근 들어 인민 자결권을 점차 융통성 있게 해석하는 경향이 생겼다. 분리독립이냐 탄압과 내전이냐 하는 단순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형태의 자결권 아이디어가 많이 나와 실험되고 있는 중이다. 독립을 원하는 집단에 자원의 통제권을 대폭 인정해 주거나 높은 수준의 자치를 보장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인도네시아의 아체 지역이 이런 실험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체는 20년 전만 해도 집단적 차원의 인권유린이 만연한 문제 지역이었다. 그러나 2005년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아체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오늘날 아체는 자카르타 정부 아래에 있는 한 지방이 아니라 ‘다에라 이스티메와’라는 특별 영토로 취급된다. 지역 내에 독자적인 정당들이 있고 지역 자치정부의 수반도 주민들이 직접 선출한다. 고도의 대내적 자결권을 행사하는 사례다.



대내적 인민 자결권이 대세이긴 하지만 주권국가로 독립을 원하는 지역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캐나다의 퀘벡 지방은 이 문제로 주민투표까지 했던 선례가 있다. 독립 여부를 놓고 올해 9월 주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인 영국의 스코틀랜드는 벌써부터 국제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아프리카의 소말리랜드, 서부 사하라, 쿠르디스탄, 그리고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다. 이 중에서 어떤 경우가 대외적 자결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독립국가라고 인정될 것인가.

인민의 자결권을 흔히 ‘민족’ 자결권으로 칭하곤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인민이란 ‘혈통과 영토’(Blut und Boden)만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고 어떤 귀속의식과 공동체 의식이 깔려 있는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외적 인민 자결권이 분리독립과 주권국가를 지향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기 나라 내에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인민 자결권에는 내부적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집단권으로서의 인민 자결권과 개인의 인권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더 나아가 개인들 간에 권리가 서로 존중되고 서로 제한되는 것처럼, 인민들 사이에서도 집단권리가 서로 존중되고 서로 제한되어야 한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국가들 사이에 협력과 선린을 추구해야 제대로 된 인민 자결권이라는 뜻이다.


요컨대 인간에겐 개인적 권리도 필요하지만 종적 존재로서 집단적 차원에서 자율 결정과 통치를 할 수 있는 권리도 필요하다. 주로 개인 권리로 이해되어 온 인권은 인민 자결권 덕분에 이론적으로 크게 확장될 수 있었다. 식민지배를 겪었던 한국인에게 인민 자결권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한반도 분단으로 인해 우리의 인민 자결권은 미완의 역사적 과제로 미뤄져 있는 상태다. 해방 후 우리 민족이 “정치적 지위를 자유로이 결정”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우리에겐 대내적 인권 민주주의와 대외적 화해·평화에 기반한 한반도형 인민 자결권 모델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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