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깊은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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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6-18 16:52 조회28,61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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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
도종환 / 시인·국회의원
슬픔은 구름처럼 하늘을 덮고 있다
슬픔은 안개처럼 온몸을 휘감는다
바닷바람 불어와 나뭇잎을 일제히
뒤집는데
한줄기 해풍에 풀잎들이 차례차례 쓰러지듯
나도 수없이 쓰러진다
분노가 아니면 일어나 앉을 수도 없다
분노가 아니면 몸을 가눌 수도 없다
기도가 아니면 물 한 모금도 넘길 수 없다
맹골도 앞 바닷물을 다 마셔서
새끼를 건질 수 있다면
엄마인 나는 저 거친 바다를 다 마시겠다
눈물과 바다를 서로 바꾸어서
자식을 살릴 수 있다면
엄마인 나는 삼백 예순 날을 통곡하겠다
살릴 수 있다면
살려낼 수 있다면
바다 속에 잠긴 열여덟 푸른 나이와
애비의 남은 날을 맞바꿀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썰물 드는 바다로 뛰어 들겠다
살릴 수 있다면
살려낼 수 있다면
사월 십육일 이전과
사월 십육일 이후로
내 인생은 갈라졌다
당신들은 가만히 있으라 했지만
다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 동안 내 자식이 대면했을 두려움
거센 조류가 되어 내 자식을 때렸을 공포를
생각하는 일이 내게는 고통이다
침몰의 순간순간을 가득 채웠을
우리 자식들의 몸부림과 비명을 생각하는 일이
내게는 견딜 수 없는 형벌이다
미안하고
미안해서 견딜 수 없다
내 자식은 병풍도 앞 짙푸른 바다 속에서 죽었다
그러나 내 자식을 죽인 게
바다만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 참혹한 순간에도
비겁했던
진실을 외면했던
무능했던
계산이 많았던 자들을 생각하면
기도가 자꾸 끊어지곤 한다
하느님 어떻게 용서해야 합니까 하고 묻다가
물음은 울음으로 바뀌곤 한다
이제 혼자 슬퍼하면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함께 울겠다
파도가 다른 파도를 데리고 와
하얗게 부서지며 함께 울듯
함께 울고 함께 물결치겠다
함께 슬퍼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걸어다닐 수 있으랴
그들 아니면 내가 누구에게 위로 받을 수 있으랴
(후략)
(한겨레, 201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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