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호] 저울과 자가 없는 나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2-09 15:22 조회19,17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염치와 상식이 증발한 한국… 문화인프라 ‘공평’ 결여 탓
양심-상식 통하는 사회라야 승자도 패자도 격차 동의하고 직업윤리-청렴도 올라갈 것
밥값-자격-소명 의식한다면 금배지 정치인은 더 겸손해야
상하수도, 도로, 철도, 공항, 항만 등은 대표적인 국가 인프라(Infrastructure)다. 정부, 국회, 정당과 문자, 화폐, 저울, 자도 다 국가 인프라다. 정신과 문화에서도 인프라 같은 것이 있다. 직업윤리, 정직, 청렴, 투명, 신뢰, 관용, 연대성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는 국제비교 지표도 있어 매년 지수(부패인식지수)가 측정, 공표되는 것도 있다. 정직과 공정은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고 아쉬워하는 덕목이다.
그런데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사회 저변에 깔려 있어 거의 의식도 못하지만, 한국에서는 현저히 결여되어 있는 정신문화적 인프라가 하나 있다. 바로 공평 혹은 형평 감각이다. 한마디로 ‘밥값’과 ‘자격’과 ‘소명’에 대한 물음이다.
다시 말해 내가 누리고 있는 고임금, 고복지에 상응하는 가치를 내가 생산하고 있나? 내가 행사하는 권력과 받고 있는 예우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자격과 실력을 갖추고 있나? 그만한 준비를 했나? 내 직업적 소명은 무엇인가? 승자도 패자도 동의할 수 있는 격차 체계는 어떠해야 하나? 이런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도 던지고, 타인에게도 던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평은 저울과 자와 같다. 이것이 없거나 제각각이면 염치와 상식이 증발한다. 힘센 자가 자의적 기준을 휘두른다. 오로지 자신의 밥그릇에 더 많은 밥을 퍼 담고, 자신의 손아귀에 더 많은 권력을 쥐는 것이 지상명령이 된다. 노동조합도, 협동조합도, 고명한 변호사, 의사, 약사, 교수도, 심지어 공무원, 국회의원과 정당도 진입장벽 높이 쳐서 독과점 이익(rent)을 추구하고, 기득권 사수를 위해 머리띠를 매는 사실상의 도적이 된다.
연대는 스스로 돕는 자조 정신을 기본으로 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아 오거나, 빼앗기지 않기 위한 우리끼리 단결 정신으로 변질된다. 물론 작은 마을 정도라면 상하수도, 도로, 도량형이 부실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큰 나라나 도시가 핵심 인프라가 부실하면 끔찍한 지옥이 된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도량형부터 통일한 이유다.
자신의 자격과 밥값을 소명의 저울에 달아 보고, 양심과 상식의 자로 재 보는 기풍이 우리 내면과 사회 저변에 흐르면 적어도 같은 일을 하고도 위치나 소속(기업)에 따라 귀족이 되기도 하고, 천민이 되기도 하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아파트 경비는 연봉 1500만 원 내외를 받는데 일부 대기업, 공기업, 공공기관의 장기근속한 정직원 경비(청원 경찰 등)는 그 3∼5배를 받는 일도 없고, 영세기업에서 잔업, 특근 엄청 많이 해서 연봉 2000만∼3000만 원을 받는 사람이, 현대자동차에 들어가서 연봉 1억 원을 받는 일도 없고, 대학교수와 시간강사의 격차도 이렇게 클 리가 없다.
더 나아가 대기업, 공기업, 공공기관 등 ‘신의 직장’이나 철밥통들의 지불 능력이 상당 부분 독과점이나 규제(진입장벽)의 산물이라는 것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도심 요지의 상가와 땅을 꿰차고, 편하게 임대소득을 올리는 사람들도, 그 권리를 분별없이 행사하여, 근로소득을 깡그리 빨아 가는 짓을 좀 자제할지도 모른다. 사회적 격차는 있을 수밖에 없지만, 유럽 선진국들처럼 생산한 가치와 권리·이익이 완만하게 비례하면 ‘실력사회’가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 기여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누리는 양반 귀족이 줄고, 격차가 줄면, 억울함과 불안감도 줄고, 교육비 임차료 등 생활비도 줄고, 고시 공시 폐인도 줄고, 직업윤리와 정직성과 청렴도는 대폭 올라갈 것이다. 공평이라는 저울과 자가 사회를 관통하면 우리 정치인들도 저 모양일 수가 없다. 자신의 밥값과 자격과 소명을 또렷하게 의식하면 정치인들도 당선, 재선을 넘어 국가적 국민적 현안 해결에 치열하게 매달릴 것이다. 자신이 달고 있는 금배지도 철저한 양당 기득권 편향의 선거제도와 정당제도가 선사한 독과점의 산물이라는 것을 자각하여 조금은 겸손해질지도 모른다. 저울과 자가 없는 나라가 문명을 건설할 수 없듯이, 공평이라는 정신문화적 인프라가 없는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는 없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동아일보, 2013. 12. 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