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돈균] 스탠드-어둠을 드러내는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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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2-17 17:23 조회20,20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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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방에는 밤의 어둠이 깃들어도 전체를 밝히는 백열등이 켜지는 법이 없다. 책들로 사방이 둘러싸인 비좁은 공간 한편에 겨우 자리 잡은 책상이 있고, 그 위에 놓인 낡은 스탠드가 이 방의 유일한 불빛이다.
무드를 위해 스탠드를 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글쟁이인 내게 `적절한 불빛`을 선택하는 것뿐이다. 나는 가끔 이 사물이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지상의 유일한 불빛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데 `적절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를 전용하자면,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각자의 몫`이란 명석하면서도 애매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정의이지 않은가. 이 사물은 자기 방식으로 그 말의 의미를 몸소 보여준다. 이 사물의 불빛은 `꼭 필요한 자리에 꼭 필요한 만큼`만 비춘다. 그것은 방 전체에 평균치로 분산되는 빛도 아니며, 필요 이상으로 내리쏟는 과잉의 빛도 아니다. 스탠드는 꼭 필요한 만큼의 범위에서 글자들의 낱낱과 문장의 율동성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에 필요한 만큼만 비추는 `최소한의 불빛`이다.
이 최소한의 불빛이 지니는 진정한 놀라움은 이 불빛이 어둠을 `제거`하는 빛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사정을 말하자면 거꾸로다. 스탠드의 불빛은 어둠에게 어둠의 본래 형상을 돌려주는 불빛이다. 스탠드를 켜는 순간 사위는 갑자기 더욱더 어두워진다. 하지만 이것은 `암흑`이 아니다. 평균치로 방안에 퍼져 있던 어둠, 그래서 `보이지 않던` 어둠이 스탠드 주위로 모여 또렷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은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어둠이 우리와 함께 늘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다.
어둠의 존재감은 부드럽고 은밀하며 깊게 체험된다. 어둠은 보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휩싸면서 우리의 몸을 만진다.
이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의 어둠이 일소해야 할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니며, 다만 `존재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적절한 빛`은 이런 식으로 빛과 어둠, 만상에 대한 인간들의 선입견과 이분법을 가로지른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매일경제, 201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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