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권리들끼리 싸우면 누가 이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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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4-11 14:57 조회21,62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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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겨레>에 “사생활 보호와 알 권리, 무엇이 우선일까요”라는 기사가 실렸다. 권리 간 충돌 문제를 다룬 내용이었다. 집회의 권리와 통행의 권리가 부딪친다면, 학생인권과 교권이 맞선다면, 죄수의 권리와 간수의 권리가 대립한다면, 노동자의 권리와 기업의 경영권이 갈등한다면 등등, 권리들끼리 싸우는 사례는 많다. 필자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동전을 모았더라면 지금쯤 돼지저금통이 하나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이슈다. 권리 간 충돌 문제는 인권에서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민감하고 골치 아픈 난제다.
권리 간 충돌은 21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도 커다란 쟁점이 되었다. 9·11 사태 이후 대테러 전쟁에서 논란이 되었던 핵심쟁점이 국가안보냐 개인 자유권이냐 하는 질문이었다. 중국의 한 자녀 정책으로 비롯된 논란 역시 비슷한 구도였다. 부부가 자녀를 가질 수 있는 재생산권과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우선시하는 공리주의적 요구가 대결했던 것이다. 프랑스 무슬림들의 히잡 착용 권리와 모든 공공교육 시설에서 종교적 상징물을 금지하는 정부의 입장 대립, 이 역시 권리 간 충돌 사례였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리 간 충돌 문제에 관해선 확실한 정답이 없다가 정답이다. 사례별로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인권은 무조건 우선시되어야 할 절대적 규범이라고 배웠는데 어째서 이렇게 어중간한 답이 나온단 말인가.
우선 권리의 충돌에도 여러 유형이 있음을 지적해야 하겠다. 다른 종류의 권리들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대중의 알 권리와 공인의 사생활 권리를 생각하면 된다. 동일한 권리의 행사방식과 한계설정을 놓고 갈등하는 경우도 있다. 표현의 자유가 소중하지만 일베들의 행태에 어떤 제한을 가해야 할지 고심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서로 다른 권리들이 충돌하기도 한다. 내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과 시민으로서의 의식이 갈등하는 게 좋은 예다. 법적 권리와 사람들의 가치가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권리’라는 말에 여러 차원이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무 데나 ‘권’자를 붙인다고 해서 무조건 인권이 되는 건 아니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일 중요한 권리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인권규범에 부합하는 권리다. 국제 인권규범은 대개 국내법으로도 인정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인권은 아니지만 법적 효력을 지닌 권리도 있다. 그다음 단계로, 중요한 이익 또는 권익이 있을 수 있다. 이 역시 현실에서나 법정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또한 법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어떤 집단에서 극히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의 문화적 영향력을 감안해 권리 비슷하게 인정해 주기도 한다.
특히 신앙이나 정체성,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권리는 정서적 인화성이 강해 민감한 충돌과 파열음을 일으키기 쉽다. 그렇다면 권리 간 갈등 문제를 해소할 방안이 있는가. 몇 가지 기본원칙이 있다. 첫째, 대다수 권리는 절대적 권리가 아니다.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이다. 자연법 전통의 천부인권론이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끼치면서 인권은 신성불가침이고 절대적이라는 믿음이 정설처럼 자리잡았다. 권리 간 충돌의 근원을 따져 보면 이런 오해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하지만 남을 해치면서까지 내 권리를 주장할 순 없다. 표현의 자유가 아무리 중요해도 아동 음란물을 제작할 자유는 인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확실한 권리라 하더라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일정한 한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오늘날 인권이 대단히 매력적인 담론으로 떠오르면서 이런 초보적인 사실조차 헷갈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에서 명쾌하게 정의했던 유명한 구절을 기억해 보라.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둘째, 권리들 간에 서열을 매길 수 없다. 정책적으로 어떤 권리를 먼저 시행할 수는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인권의 가치가 중요하다. 권리들이 충돌할 때 어떤 권리를 배제할 것이 아니라 모든 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를 찾아야 한다. 최선이 어려우면 차선책이라도 모색해야 한다. 즉 인권에서도 균형과 타협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셋째, 어떤 것에 대한 청구권이 있다 하더라도 그 권리를 모두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했다 해서 다산콜센터의 상담사에게 모든 맛집 정보를 요구하거나 어떤 속옷을 입고 있느냐고 묻는 따위의 성희롱을 할 권리는 세상에 없다.
넷째, 권리들끼리 충돌할 때엔 각 권리의 범위를 정해야 하고 사안의 맥락을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구나 공개적으로 말할 자유가 있지만 어떤 맥락에서 그것이 표출되는지를 따져야 한다. 사람이 가득 찬 소방서에서 “극장이야”라고 소리치는 건 별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사람이 가득 찬 극장에서 “불이야”라고 소리칠 자유는 인정되지 않는다. 전혀 다른 맥락의 행동이고,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회의 법적, 문화적 규범도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예컨대 ‘동방예의지국’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욕설을 퍼붓는 행위를 표현의 자유라는 식으로 옹호하기는 어렵다.
다섯째, 본질적 권리와 부차적 권리 사이의 무게를 달아 경중을 판단해야 한다. 이것을 핵심적 권리와 주변적 권리로 구분하기도 한다.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어떤 가치에다 ‘권’자를 붙여 절대적 권리로 내세울 때 제로섬 게임 같은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모든 ‘권리’의 무게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사안별로 권리들의 무게가 다르고, 같은 권리라 해도 경우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서구에서 간혹 인용되는 사례가 있다.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어떤 사람이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업무로 관공서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종교적 이유로 그런 정체성에 반대하는 공무원이 창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직원은 자신의 신앙 때문에 그 업무를 볼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직원을 불러 주겠다고 했지만 차별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 하지만 법원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업무 거부가 본질적 권리에 해당한다고 공무원의 손을 들어줬다. 비슷한 사례가 또 있었다. 특정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인쇄업자가 소수자 단체에서 요청한 책자 제작을 거부했다 제소당했다. 이번에는 법원이 인쇄업자의 행동을 차별이라고 판결했다.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 해도 영업 거부는 주변적 권리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권리 간 충돌 문제는 일률적인 잣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원칙, 상식, 균형감각을 발휘해서 황금비를 찾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원칙인지, 어떤 상식인지를 면밀히 따질 필요는 있다. 인권의 원래 취지가 인간의 본질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 다수결 원칙으로도 인권을 침해하진 못한다. 그렇다면 권리 충돌이 발생할 때 되도록이면 약한 사람과 소수자의 눈높이에 인권의 눈금을 맞춘다는 원칙과 상식을 지켜야 한다. 이 점에서 법률가들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권리 간 충돌은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문제다. 인권의 목록이 늘어나고, 신념과 이념에 근거하여 인권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불확실성 때문에 권리 간 충돌이 인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또한 권리들이 서로 충돌해 온 과정이 인권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이 발전한다는 말은 인간사회가 진보한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인간사회가 전진할 때 갈등과 긴장이 없을 수 없다. 권리 간 충돌은 인류 진보의 성장통인 셈이다. “권리들의 충돌은 사법부도, 입법부도 어떤 일관된 원칙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독특한 문제”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권리 충돌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은 그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잊혀질 권리’, ‘존엄하게 죽을 권리’ 혹은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과 같은 논란을 보라. 단시간에 인권 목록에 오르는 권리 요구도 있지만 오랜 논쟁을 거쳐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적지 않다. 권리 간 충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인권은 그 시대에 특유한 억압권력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규정된다는 사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4.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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