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엽] 세월호 침몰사고와 재난유토피아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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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4-25 16:28 조회22,32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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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사고 소식을 듣고 지난해 읽었던 리베카 솔닛의 <지옥에 세워진 낙원>(국역 <이 폐허를 응시하라>)을 다시 들쳐보았다. 이 책은 1905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비롯해 세계 여러 곳의 재난 현장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어떤 지적 작업이 이루어졌는지 분석하고 있다.
솔닛은 상세한 고찰을 통해 몇 가지 일반적 사실을 이끌어낸다. 우선 재난은 대중이 아니라 평상시에 힘을 가진 엘리트들을 패닉에 빠뜨린다. 그 이유는 엘리트의 권력이 그 평상의 유지 자체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상사태는 엘리트의 무능과 그들이 운영하는 제도의 무가치를 폭로한다. 이런 무능은 때로 두려움으로 이어져 최악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자경단원들이 허리케인 재해 속에서도 자구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뉴올리언스의 유색인종들을 폭도로 간주해 살해했던 일이 그런 예다.
이에 비해 일반 대중은 서로를 돕고 신속하고 능력 있게 상황을 헤쳐나간다. 평상시에는 사람들 안에 잠복해 있던 이타심과 상호부조의 마음이 깨어나며, 서로에게 간절한 것을 서로에게 기꺼이 내준다. 솔닛이 지적하듯이 비록 재난이 지옥과 같은 고통을 줄 때에도 그 지옥 안에서 사람들은 재난공동체를 형성하고 재난유토피아를 일구어나가는 것이다.
지난해 이 책을 읽을 때 계속 머리에 떠오른 것은 2007년 ‘삼성1호-허베이스피릿호 원유유출 사고’ 때 해안의 기름때를 닦아내던 어민들과 100만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책을 넘겨보며 든 의문은 왜 세월호 침몰사고의 경우에는 다른 재난에서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허둥대는 엘리트들을 압도해 나가며 고통을 이겨내고 희망을 자아내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섣부른 짐작일지 모르지만 거기엔 이번 사건의 특수성이 작용하는 듯하다. 탈출하지 못한 수백명의 승객 구출이라는 중심 과제가 신속한 장비 동원과 고도의 현장 협동 능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분산적이고 자생적인 자구활동과 상호원조로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일 뿐 아니라, 관료적 행정을 우회해 개입하기도 어렵게 한다. 그런 상황에서 관료적 무능은 도리어 방해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이번 사고에서도 재난 위에 재난을 쌓는 악행들이 벌어지고 있다. 승객을 버리고 탈출한 선장과 승무원, 정치인이나 누리꾼들의 악성 발언, 관료적인 책임회피가 그렇다. 관료조직을 거세게 비판하는 대통령도 그런 예에 속한다. 그런 공감의 포즈는 실상 행정 수반으로서의 책임을 피하며 자신을 분노한 국민들 사이에 슬쩍 끼워 넣는 비겁함일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악행마저 이겨내는 구조 소식과 이웃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는 재난유토피아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한 무기력감의 표현이 유족들이 청와대를 향해 걷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 유족들이 제지당하는 모습 위로 어두운 바닷속에 갇힌 아이들의 모습이 고통스럽게 겹쳐 오기 때문에 모두들 분노의 감정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원인과 대처방식이 더 큰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이 재난 앞에선 생각하는 일조차 힘겹다. 그럼에도 깨달음처럼 떠오르는 생각은, 재난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더 순수하게 대면하게 한다는 것, 우리의 일상 또한 저강도의 재난 상태에 있다는 것, 재난 속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평상시에도 절실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솔닛의 말도 떠오른다. “재난은 우리가 선잠에서 깨어나도록 충격을 주지만, 우리를 계속 깨어 있게 만드는 것은 오직 능숙한 노력뿐이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14. 4. 22.)
솔닛은 상세한 고찰을 통해 몇 가지 일반적 사실을 이끌어낸다. 우선 재난은 대중이 아니라 평상시에 힘을 가진 엘리트들을 패닉에 빠뜨린다. 그 이유는 엘리트의 권력이 그 평상의 유지 자체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상사태는 엘리트의 무능과 그들이 운영하는 제도의 무가치를 폭로한다. 이런 무능은 때로 두려움으로 이어져 최악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자경단원들이 허리케인 재해 속에서도 자구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뉴올리언스의 유색인종들을 폭도로 간주해 살해했던 일이 그런 예다.
이에 비해 일반 대중은 서로를 돕고 신속하고 능력 있게 상황을 헤쳐나간다. 평상시에는 사람들 안에 잠복해 있던 이타심과 상호부조의 마음이 깨어나며, 서로에게 간절한 것을 서로에게 기꺼이 내준다. 솔닛이 지적하듯이 비록 재난이 지옥과 같은 고통을 줄 때에도 그 지옥 안에서 사람들은 재난공동체를 형성하고 재난유토피아를 일구어나가는 것이다.
지난해 이 책을 읽을 때 계속 머리에 떠오른 것은 2007년 ‘삼성1호-허베이스피릿호 원유유출 사고’ 때 해안의 기름때를 닦아내던 어민들과 100만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책을 넘겨보며 든 의문은 왜 세월호 침몰사고의 경우에는 다른 재난에서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허둥대는 엘리트들을 압도해 나가며 고통을 이겨내고 희망을 자아내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섣부른 짐작일지 모르지만 거기엔 이번 사건의 특수성이 작용하는 듯하다. 탈출하지 못한 수백명의 승객 구출이라는 중심 과제가 신속한 장비 동원과 고도의 현장 협동 능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분산적이고 자생적인 자구활동과 상호원조로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일 뿐 아니라, 관료적 행정을 우회해 개입하기도 어렵게 한다. 그런 상황에서 관료적 무능은 도리어 방해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이번 사고에서도 재난 위에 재난을 쌓는 악행들이 벌어지고 있다. 승객을 버리고 탈출한 선장과 승무원, 정치인이나 누리꾼들의 악성 발언, 관료적인 책임회피가 그렇다. 관료조직을 거세게 비판하는 대통령도 그런 예에 속한다. 그런 공감의 포즈는 실상 행정 수반으로서의 책임을 피하며 자신을 분노한 국민들 사이에 슬쩍 끼워 넣는 비겁함일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악행마저 이겨내는 구조 소식과 이웃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는 재난유토피아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한 무기력감의 표현이 유족들이 청와대를 향해 걷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 유족들이 제지당하는 모습 위로 어두운 바닷속에 갇힌 아이들의 모습이 고통스럽게 겹쳐 오기 때문에 모두들 분노의 감정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원인과 대처방식이 더 큰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이 재난 앞에선 생각하는 일조차 힘겹다. 그럼에도 깨달음처럼 떠오르는 생각은, 재난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더 순수하게 대면하게 한다는 것, 우리의 일상 또한 저강도의 재난 상태에 있다는 것, 재난 속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평상시에도 절실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솔닛의 말도 떠오른다. “재난은 우리가 선잠에서 깨어나도록 충격을 주지만, 우리를 계속 깨어 있게 만드는 것은 오직 능숙한 노력뿐이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14.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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