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렬] 출산율 저하와 삶의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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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2-26 16:59 조회18,91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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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아주 낮은 출산율이 집권당의 주요 회의에서 거론된 것 같다. 출산율이 낮으면 20년 후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닥칠 것이므로 자녀 하나 낳은 분은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원내대표와 당대표는 출산율을 공천에 반영하는 것도 무겁게 고려하자는 식으로 화답했다고 한다. 4년이나 5년 앞도 내다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20년 후를 염려하는 것이 대견하지만, 진단과 처방은 신통찮다.
지금과 같이 1이 조금 넘는 출산율이 수십년간 지속되면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고 그 결과 생산력과 경제규모가 축소된다. 이에 반해 수명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비노동인구가 증가하면, 세대 간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워질 수 있다. 그 결과 불만이 쌓이게 되고,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재앙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혼란을 낳을 수 있다. 하지만 결과가 반드시 부정적일 것이라고 속단하기에는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장기적으로는 출산율 저하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재앙에 가까운 사태를 막기 위한 집권당의 처방은 오직 하나,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공천이라는 강력한 수단까지 동원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강한 처방을 적용한다 해도 출산율을 높일 수 없다. 출산율 저하는 세계적 추세다. 세계를 다 뒤져도 출산율이 증가하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유아 사망률이 크게 낮아지고,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되고, 여성의 교육수준과 경제활동이 높아지고, 노후를 자식보다 국가에 더 의존하게 되는 경향이 지속되는 한 출산율 증가는 없다.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감소 추세가 더 두드러진다.
출산율 저하는 장기적으로 인구 감소를 가져온다. 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인구는 수십년 후부터 줄기 시작해 100년 후에는 지금의 절반으로 감소한다. 인구가 줄어들면 자원 이용도 줄어든다. 한국의 환경과 자원 수용능력은 이미 오래전에 포화상태를 넘어버렸다. 먹고살려면 해외에서 막대한 자원을 가져올 수밖에 없고, 그걸 가공해 되파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만 지난 수십년 사이에 인구가 크게 증가해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 일에 매달려야만 하게 되었기 때문에 경쟁이 심해졌다. ‘좋은’ 일자리를 놓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됐다.
출산율이 낮아지면 적어도 입시 경쟁과 일자리 경쟁은 줄어든다. 나이든 사람들이 계속 기득권을 고수하고 더 풍요로운 생활을 원하지만 않으면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숨통이 조금씩 트여가는 것이다. 출산율 저하로 인구까지 줄어들게 되면 자원 소비가 감소하고 분배 가능한 토지가 늘어나고 주택사정이 좋아진다. 자원과 에너지 소비가 줄어들면 환경의 질이 높아지고 기후변화 문제도 완화된다. 한마디로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나이든 사람들이 성장 신화에 붙들려 계속해서 성장이라는 신기루를 좇으면서 더 많은 물질적 부를 추구한다면 집권당에서 염려하듯 혼란을 넘어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
출산율 저하는 돌이킬 수 없는 추세다. 남북이 통일되어 사람들의 활동공간이 크게 넓어진다고 해도 이 추세는 바뀌지 않는다. 성장과 기득권을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들은 북한의 인구와 자원에 은근히 기대를 거는 것 같다. 통일이 인구와 출산율, 자원과 땅을 늘려주어 다시 한번 경제도약을 가능하게 해주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기대가 아마 통일대박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반도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장기적인 번영과 삶의 질을 염려한다면, 출산율 저하를 현실로 인정하고, 그 위에서 새로운 기획을 모색하는 쪽으로 사고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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