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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세계인권선언은 누가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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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2-16 17:00 조회19,5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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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2월10일은 인권의 날이다. 현대 인권의 분기점이 된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인권의 역사를 세계인권선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본 선언의 의미는 각별하다. 지구상의 414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 세계인권선언의 성립과 해석을 둘러싸고 수많은 연구가 나와 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는 이른바 ‘정설’이라는 주류적 서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세계인권선언도 예외가 아니다. 인류가 20세기 들어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특히 홀로코스트라는 반인도적·반문명적 참화를 거친 후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역사적 서약이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미국 의회에서 행한 ‘4대 자유’ 연설, 그리고 같은 해에 발표된 연합국들의 대서양헌장에서도 인권이 언급되었던 선례가 거론된다. 크게 보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 뒤에는 세계인권선언을 제정했던 유엔의 역할을 강조하고, 미국 등 전승국들의 헤게모니를 은연중에 받아들이는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정은의 연구에 따르면 1948년 한국에서도 세계인권선언을 만민평등의 세계헌장, 그리고 유엔의 대표처럼 생각되던 미국 문명의 산물이라는 식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경이 있으면 외경이 있고, 모든 사건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수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는 법이다. 따지고 보면 정통 서사라는 것도 결국 힘 있는 쪽의 관점에서 본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해 세계인권선언의 제정을 둘러싼 비주류적 해석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선 민간단체, 비정부기구(NGO), 그리고 개인들의 활약을 살펴보자. 흔히 국제 인권엔지오는 노예무역 반대단체들이 결성되었던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후 20세기 전반쯤이면 국제 인권운동계라고 부를 만한 공론의 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국제적 인권기준을 만들자는 제안은 홀로코스트가 발생하기 전에 벌써 나왔다. 국제인권협회(FIDH)가 1920년대에 국제인권선언을 만들자고 제창했던 적이 있고, 1940년엔 소설가 H. G. 웰스가 인간권리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본다면 세계인권선언의 지적 뿌리는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멀리 뻗어 있다. 엔지오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 유엔의 창설이 가시화되자 그 과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이들은 유엔을 강대국들의 클럽으로 만들려는 패권적 움직임에 강력히 맞섰다. 비서구 국가들과 연대하여 인권과 소수민족 보호, 식민 해방을 유엔헌장 정신 속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안전보장이사회보다 총회의 권위를 높여야 한다는 수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했던 마흔두 개 국제엔지오 중에는 재미 한인 동포들이 1938년 결성한 중한민중동맹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로서 특별히 기억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엔지오들은 공식 발언권이 없었지만 회의장 바깥에서 이른바 ‘복도 로비’를 통해 인권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데 맹활약을 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강대국이 아닌 나라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유엔 내에 인권위원회를 만들자고 주장해서 관철시킨 것이 중소국들이었는데, 이들은 1947년부터 시작된 세계인권선언의 작성 과정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칠레·레바논·중국·이집트·인도·파나마·필리핀·우루과이 등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중소국들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인권 목록에 확실히 포함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의식주, 사회보장, 의료, 적절한 생활수준, 노동, 휴식, 교육, 문화 등이 인권에 포함됨으로써 세계인권선언이 18세기형 자연권과 확실히 다른 새로운 인권헌장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칠레 대표 에르난 산타크루스는 사회권의 챔피언으로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다. 중소국들은 여성의 권리를 격상시키는 데에도 큰 몫을 했다. 예를 들어 영어권 국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든 사람(all men)이라는 남성형 표현을 ‘all human beings’라는 중성형 표현으로 바꾸는 데 앞장선 사람이 인도의 한사 메타 대표였다. 중소국들과 소련은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현실을 고발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지난주 타계한 만델라가 생생히 목격했던 1946년의 유색 노동자 대파업 당시 백인정권이 저지른 탄압과 학살을 규탄하는 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또한 중소국들은 민족 자결권과 정치적 독립 역시 인권의 일부임을 확실히 부각시켰다. 식민지배를 받던 지역의 주민도 동등한 권리를 지닌 평등한 인간임을 각인시켰던 것은 이집트 대표 오마르 루트피의 공이 크다. 세계인권선언이 유엔총회를 통과하기 전인 1948년 4월,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남·북미 국가들이 모여 <아메리카 인간권리와 의무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의 전문에 나온 구절이 세계인권선언 1조에 거의 그대로 등장할 정도였다.


세계인권선언에 유교의 가르침이 상당히 반영된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흔히 위계적·봉건적·전통적 입장 때문에 유교의 세계관과 근대 개인주의적 인권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골이 깊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고정관념을 바꾼 사람이 중국 대표 장펑춘이었다.



중소국들은 세계인권선언의 초안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자기들 나름의 독특한 관점들을 제시하여 호응을 받기도 했다. 필리핀과 중국이 ‘의복’을 인권 항목에 넣자고 주장했던 것이 좋은 예다. 이들이 아니었으면 의식주 중 ‘의’에 해당하는 인권이 자칫 사라질 뻔했던 것이다. 민주선거를 규정한 21조의 비밀투표 항목에 대해 아이티 대표는 문맹자가 많은 나라에서는 비밀투표가 자칫 국민의 선거참여를 제한할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아무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점이었다. 중소국들이 이렇게까지 세심한 기여를 한 덕분에 세계인권선언은 “국제규범을 작성함에 있어 비강대국들의 참여가 가장 높았던” 문헌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계인권선언에 유교의 가르침이 상당히 반영된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흔히 위계적·봉건적·전통적 입장 때문에 유교의 세계관과 근대 개인주의적 인권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골이 깊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고정관념을 바꾼 사람이 중국 대표 장펑춘(張彭春)이었다. 톈진에서 태어난 장펑춘은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대학에서 존 듀이의 지도로 교육철학 박사를 받은 후 귀국하여 난카이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그는 나중에 국민당 정부의 외교관으로서 유엔 대표를 지냈는데 중국 고전과 서양 학문에 두루 정통한 인물로서 세계인권선언 작성 과정에서 ‘지적 거인’의 역할을 했다.


장펑춘은 세계인권선언이 서구 중심적 틀을 벗어나 진정으로 보편적 선언이 되도록 하는 데 단단히 한몫을 했다. 그는 기독교 자연법적 인권관을 명시하자고 하던 많은 위원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인권을 인간의 이성과 양심에 근거한 ‘인본적’ 개념으로 확정짓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했다. 우리가 흔히 ‘천부인권’이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세계인권선언의 기준으로 보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곧,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거부하고 휴머니즘으로서의 인권을 주장한 것이다. 장펑춘은 유엔 대표단들에게 인권의 바탕에는 인(仁)이 있다고 설명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람(人)이 둘(二) 있을 때 서로 간에 취해야 할 자세가 바로 인(仁)이며 그것이 곧 인권이라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유럽으로 귀향하면서 소개했던 유교 고전들을 볼테르나 디드로 등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읽고 그것으로부터 근대 인권 사상의 일부가 도출되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장펑춘은 동양의 과거제도가 신분이나 출신이 아니라 본인의 능력에 따라 관직에 오르도록 한 민주적 제도였다고 하여 선언의 21조에 나오는 동등한 공무담임권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엔지오·중소국들·비서구권의 기여가 없었더라면 세계인권선언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지금보다 훨씬 짧고, 경제·사회권은 대단히 소략하며, 식민지배를 거부하는 논리도 희박했을 것이다. 인권이 도덕적 규범으로 호명될 수 있는 절박함이나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짠함’이 크게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


엔지오·중소국들·비서구권의 기여가 없었더라면 세계인권선언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지금보다 훨씬 짧고, 경제·사회권은 대단히 소략하며, 식민지배를 인권의 이름으로 거부하는 논리도 희박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인권이 도덕적 규범으로 호명될 수 있는 절박함이나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짠함’이 크게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본다면 인권에서 비주류적 시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류에 속한 사람은 약자, 소수자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계인권선언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제일 중요한 교훈이다. 인간 존엄성의 비타협적 옹호, 이 동아줄만 부여잡고 소외된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에 겸손하게 귀 기울이라는 천둥 같은 메시지!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3.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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