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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고혈압, 당뇨, 암, 에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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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2-18 16:01 조회19,4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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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은 세계 에이즈의 날이었다. 에이즈, 즉 후천면역결핍증이라는 질병에 대한 오해를 풀고 감염인들에 대한 편견 및 차별을 제거한다는 취지로 많은 행사가 이어졌다. 최근 들어 각 매체의 보도에서 가장 부각되는 점은 치료제의 발달로 에이즈는 더 이상 무서운 불치병이 아니게 되었으며, 고혈압과 당뇨, 암이나 마찬가지로 관리만 잘하면 본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 만성질환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실제 1980년대 초반 처음 에이즈라는 질병이 알려진 뒤 그간 많은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 유행 초기 에이즈는 동성애자들만 걸리는 천형이자 긴 잠복기 끝에 불쑥 찾아오는 치사의 질병으로서 극도의 공포를 자아내던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에이즈는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서는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져 있고, 작년 한국에서는 에이즈에 대한 특별관리 체계가 종결되었다. 외국에서는 완치 사례까지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니 이제 에이즈도 고혈압이나 당뇨나 마찬가지로 “그저” 만성질환일 뿐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만약 그랬다면 최근 논란이 된 한 요양병원에서 환자를 방치하여 때 이른 죽음에 이르게 한 것과 같은 인권침해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해당 요양병원만 탓할 수 없다는 점이다. 보건복지부는 에이즈의 만성화와 환자 고령화에 대비하여 장기요양사업을 시작하면서 민간 요양병원에 사업을 위탁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감염인들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요양병원이었던 이곳에는 사실 암 환자들을 비롯하여 다른 많은 입원 환자들이 함께 있었고, 이들에게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들의 존재가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던 병원 쪽은 감염인들에게 심한 통제를 할 뿐 제대로 된 의료적 처치를 제공하진 않았다.

물론 비용과 수익을 고려해야 하는 민간 요양병원의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적지 않은 개인 비용을 따로 치르고 있는 다른 입원 환자들 대다수가 감염인을 꺼린다고 할 때 민간 요양병원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노동조건에 있는 직원들에게 역시 신경 쓸 일이 더 많은 감염인들은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공병원으로 운영하면 바로 해결될 상황도 아니다. 진주의료원의 경우에서 보듯, 경영 수지 개선 압박이 큰 상황에서는 공공병원 역시도 지역민들의 반발을 사거나 다른 내원 환자들이 감소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사실은 결국 에이즈에 대한 낙인이 치료제의 개발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계 어디서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 취약 계층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이들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돌볼 여력이 없거나 의료에 대한 접근권이 떨어지는 계층, 사회적 차별에 이미 노출되어 있는 소수자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청소년층에서 감염자가 꾸준히 늘고 있는 것은 치료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제때 의료기관을 찾지 못하거나 자신의 성적 정체성이나 감염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에이즈가 이제 만성질환이라는 말은 앞으로 사회가 장기간의 약값이나 돌봄의 문제, 감염인들의 노동권과 주거권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고혈압이나 당뇨 등 다른 만성질환 관리에서도 빈곤과 노동, 환경, 차별 등 익숙한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은가. 획기적 치료법의 개발이 시급한 시점을 지나서, 필요한 사람들 누구나 그 혜택을 누리도록 사회가 바뀌는 게 더 중요한 때가 된 것이다.


백영경 방송통신대 교수·문화인류학
(한겨레, 2013.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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