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소유공화국’을 넘어 공통체의 세계로 VS 개별적 특이성 무시한 공통체론 ‘공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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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1-08 16:57 조회20,54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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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통체…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 정남영·윤영광 옮김 | 사월의책 | 600쪽 | 2만8000원
■ ‘소유공화국’을 넘어 공통체의 세계로
22일간 최장기 파업과 노동자 총파업, 그리고 광범한 사회적 연대에도 불구하고 좌절되어 결국 분신의 절규와 정권퇴진의 함성으로 이어지고 있는 철도노조의 파업. 그것이 실제로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일까. 사유화되지 말아야 할 것은 철도만이 아니다. 토지·대기·물과 같은 자연적인 것들, 식량·주택·의료·교육·교통·지식·정보·소통·정동(情動) 같은 사회적인 것들의 사유화는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 이것들은 ‘공통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 ‘공통적인 것’을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으로 분리해 사적이거나 공적인 소유체제에 종속시켜 왔다. 최근의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는 경제적인 것을 모두 ‘사적인 것’으로, 사회적인 것을 모두 ‘공적인 것’으로 재배치하는 구도를 밀어붙이고 있다. 그것의 효과는 사유화된 경제적인 것에서 다중의 완전한 배제이고, 공유화된 사회적인 것에서 다중에 대한 권력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다. 이 과정을 통해 ‘공통적인 것’은 완전히 비가시화될 위기에 처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공통적인 것의 이 비가시화 전략이 바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공통적인 것에 의거한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는 시기에 전면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물·대기는 온난화하거나 오염되고 있고 교통과 통신은 정체되고 있고 금융과 재정은 위기에 빠져 있고 삶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겁박을 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공통적인 것을 바탕으로 삼는 현대 자본주의가 그것을 경제적인 것의 사유화(신자유주의)와 사회적인 것의 국유화(공화국)라는 이중체제하에 포섭한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지금 다중에게 긴급한 문제는 신자유주의 소유공화국의 흡혈과 은폐에 의해 그림자만 어른거리는 공통적인 것의 유령에, 분명한 실재성과 정치적 형상을 부여하는 일이다.
<제국> <다중>에 이은 제국 3부작의 종결이자 <선언>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탐구의 출발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책 <공통체>는 이 긴급한 문제에 답하기 위한 이론적 실천의 산물이다. 이들에 따르면, 모든 개인들을 소유자로서 구성하고 보호하는 장치인 소유공화국은 동시에 소유에서 배제되는 광범위한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도 동시에 생산한다. 공화국에서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소유기계의 부품으로서 물질적·비물질적 노동을 통해 그것을 떠받치는 역할이 부과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의미에서 공화국 내부에 있는 그것의 외부다.
19세기와 20세기에 프롤레타리아들은 거듭되고 끈질긴 혁명운동을 통해 일부 지역에서 자유주의 공화국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유체제의 종말이 아니라 국유체제의 확립으로 끝났고 이후 지구는 서(西)의 사유체제와 동(東)의 국유체제로 양분되었다. 이것이 냉전시대의 구도다. 경제적인 것은 사유화하고 사회적인 것은 국유화하는 신자유주의 전략은 이 두 체제를 지구적 차원에서 종합한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분리를 통해 ‘공통적인 것’을 비가시적 ‘지하-자원’으로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이 전략은 그러므로 근대 소유공화국 논리와 그 역사의 심화이자 중층화인 셈이다.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역사적 국유체제의 국가들은 ‘해체’ 혹은 ‘요동’의 시기를 이용해, 또 미국을 비롯한 역사적 사유체제 국가들은 금융위기나 재정위기를 이용해, 경제적인 것의 사유화와 사회적인 것의 국유화에 기초한 지구 제국의 문법을 공동으로 확립해 왔다. 저자들이 ‘공적인 것’의 수호 혹은 창출에서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찾는 좌파의 ‘보수적’ 상식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그와는 다른 방향에서 신자유주의적 사유화에 대한 대안을 찾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국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공사 가운데 양자택일이 아니라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분리와 이중화 그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 ‘다중의 군주되기’라는 말로 요약되는 이 과정에 대한 탐구는 6부로 구성된 각 부의 3장들(‘빈자 다중’ ‘대안근대성’ ‘다중의 카이로스’ ‘반란의 계보’ ‘단층선을 따라 일어나는 전진(前震)’ ‘혁명을 다스리기’)에서 서술된다.
이 장들을 통해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신경제학이 서술하는 ‘사회적 자본’ ‘외부경제’ ‘불경제’ ‘호의’ ‘무형자산’ 등 경제적 범주들이 숨기고 있는 것이 바로 자연적이거나 사회적인 ‘공통적인 것’이며 2008년의 촛불봉기, 2011년의 실질 민주주의를 위한 반란, 2013년의 철도 사유화 반대 투쟁 등이 모두 공통적인 것의 운동임을 감지할 수 있다.
제국의 경제를 구성하는 생산적 힘이면서 제국에 대항하는 사회적 반란의 주체성인 공통적인 것의 이 유령들이 어떻게 공화국을 넘어 공통체를 구성할 수 있을까. 이 책이 제기하는 이 물음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어느 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조정환 |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
안토니오 네그리(왼쪽)와 마이클 하트
■ 개별적 특이성 무시한 공통체론 ‘공허’
세밑에 당도한 네그리와 하트의 대작 <공통체>는 오랜만에 받아본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저자들은 에크하르트에서 스피노자를 거쳐 마르크스, 그람시, 푸코, 들뢰즈-가타리를 종횡무진하면서 서양 근대의 온갖 존재론과 혁명론을 풍성하게 엮어낸다. 그것뿐이랴. 동시대 사상가들의 목소리에도 충실히 응답하면서 우리 시대가 처한 정치적 아포리아에 대한 올바른 대처 방안을 분주하게 제시한다.
<공통체>는 그간 저자들의 정세파악과 이론구성이 일관된 것임을 보여준다. 10년 가까운 세월에 걸친 저자들의 관찰과 실천과 숙고는 사회주의 파산 이후의 글로벌 정치경제 체제 분석(<제국>)과 이 체제에 대립하는 집단적 주체의 구성(<다중>)을 거쳐 혁명적 행동을 위한 대안적 세계상의 제시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공통체’란 이 대안적 세계상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는 개념이다. 이 개념에 의거해서 네그리와 하트는 새로 도래할 세계상을 제시한다. “순전히 개념적인 수준에서 우리는 코뮤니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적인 것이 자본주의의 기반이고 공적인 것이 사회주의의 기반이라면, 코뮤니즘의 기반은 공통적인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공통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고전경제학은 이 공통적인 것을 시장의 ‘외부성’ 혹은 ‘부재시장’의 영역으로 간주해왔다. 수도, 철도, 전파 등의 물질적 ‘공공부문’이자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뤄지는 무형의 ‘인간 네트워크’ 같은 것이 공통적인 것에 포함되는 인간 삶의 층위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은 공통적인 것을 시장에 맡길 것이냐 아니면 국가의 통제·관리하에 둘 것이냐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하지만 네그리와 하트는 두 체제 모두 공통적인 것을 ‘소유’ 패러다임에서 사유했기에 이는 다가올 세계를 위한 적절한 대안이 못된다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대안적 근대란 사적인 것(시장)과 공적인 것(국가) 모두로부터 자율적인 공통적인 것의 적극적인 탈환과 창출을 통해 가능해진다. 사적·공적 통제 모두로부터 벗어난 자율적인 삶과 부의 창출, 이것이 네그리와 하트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궁극적 대안인 셈이다.
이런 대안은 고유의 정치적 존재론과 자본주의 역사관에서 비롯된다. 저자들은 푸코의 삶정치(biopolitics)에서 통제·관리적 측면만이 아니라 생산적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삶정치가 권력 이전의 자율성이라는 또 다른 벡터를 가짐을 강조한다. 이것이 이들의 정치적 존재론이라면,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 노동자 계급의 저항을 일차적인 동인으로 삼는다. 즉 호황과 불황의 경기 곡선은 시장 고유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저항에 따라 결정되어 왔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은 자본·국가에 대항하는 자유로운 주체들의 저항과 투쟁에 따라 소유 모델을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 맥락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신자유주의 글로벌 체제를 저항의 입장으로부터 서술함으로써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려 한다. 그렇게 제시된 대안은 기존의 대안 모델과는 전혀 다른 형상으로 드러난다. 가령 공통적인 것은 20세기의 정체성 정치(젠더, 인종, 계급 등)를 기반으로 하지만, 주체는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한다. 즉 주체는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대타자를 파괴함으로써 스스로의 특이성을 회복하는 끊임없는 생산과 변용의 과정에 스스로를 내맡겨야 한다. 이렇게 됐을 때 개인에게 위계적 수준의 정체성과 위치(역할)를 부여함으로써 사회질서를 구축했던 근대적 사회 모델은 불가능해진다. 특이성의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 구성되는 ‘공통체’에는 그런 ‘구축물로서의 제도’ 따위는 불가능하며, ‘끊임없는 반란의 제도화’라는 역설적 시공간만이 유일하게 부합하는 이미지로 남을 것이기에 그렇다.
이러한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에는 경청할 부분이 많다.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답답한 복지논쟁 지형에 숨통을 틔어주는 아이디어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읽는 내내 따분하고 답답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이론이든 역사든 해석이 모두 견강부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상가들을 다룰 때 비판이든 인용이든 지성사적으로 성실하게 해석했다기보다는 자기주장을 위한 들러리 역할을 떠맡긴 경우가 많다. 또한 저자들이 전 지구적으로 수집한 반란의 역사는 저자들이 좋아하는 개별적인 특이성을 상실한 채 다중과 공통적인 것으로 환원되어 평면화된다.
물론 이론적 작업에 어느 정도의 획일화와 추상화가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과욕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저자들의 과욕은 자신들의 핵심개념이자 실천원리이고 인간학인 ‘특이성’을 이론과 역사에 대한 산문적 서술 속에서 파괴해 버렸다. 따분한 독서가 될 수밖에 없는, 공허한 느낌을 남길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봉기와 반란과 사건의 시적 향기를 기록하고 복원하는 일, 먹물들의 실천에 혁명적 의의가 있다면 네그리와 하트가 놓쳐버린 이런 작업이 아닐까.
<김항 | 연세대 국학연구원 HK 교수>
(경향신문, 201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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