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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 정치·과학·예술·사랑을 지휘하는 것이 철학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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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1-01 15:29 조회21,3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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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와 사건
알랭 바디우 지음·조형준 옮김 |
새물결 | 845쪽 | 3만9000원

‘philosophy’의 번역어로 ‘철학(哲學)’이란 조어를 만든 것은 19세기 말 일본의 난학자(蘭學者) 니시 아마네(西周)였다. 그는 동아시아의 동시대인들이 그랬듯 성리학에서 출발하여 서양 학문으로 ‘전향’한 개화 지식인이었다. 현재 한·중·일 세 국가에서 통용되는 개념어 중 상당수가 니시 아마네의 작품임은 주지의 사실인데, 그가 처음에는 ‘philosophy’를 ‘희철학(希哲學)’이라 번역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처음에 니시는 ‘깨달음(哲·sophia)을 사랑/희구한다(philo)’는 원뜻에 충실하게 번역했던 것이다. 그래서 ‘철학’이란 용어는 ‘희’가 탈락된 결과물인 셈이다. 이를 두고 일본의 저명한 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는 ‘philosophy’에서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희구하는 태도나 실천이었을 터인데, 정작 중요한 그 ‘희’가 누락되어 체계와 논리만을 정태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형해화된 앎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즉 세상의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더 생생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역동적 앎의 운동인 ‘philosophy’가 오랫동안 축적된 지식 체계를 권위적으로 가르치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고리타분한 학문 분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philosophy’와 ‘철학’을 둘러싼 이런 고바야시의 진단은 서양 문물을 번역하고 수용해야 했던 근대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희’의 탈락과 망각은 ‘philosophy’의 본고장에서도 오랫동안 질타 받아 왔기 때문이다. 니체에서 하이데거에 이르는 현대 독일 사상의 계보가 그랬고, 1960년대 후반 이후의 프랑스 사상계는 ‘philosophy’의 이름으로는 더 이상 총체적 지식이 불가능함을 다양한 방식으로 선언했다. 푸코와 데리다로 대표되는 이 흐름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명명되기도 했는데,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란 이를 극명하게 표현하는 개념이었다. 다소 거칠게 이 흐름을 정리하자면, 이제 진리와 주체를 중심으로 체계화되고 영위되는 지적 실천이란 존재할 수 없고, 그런 시도를 반복하는 지적 영위는 모두 온갖 종류의 지배를 위해 봉사하는 체제의 앎이며, ‘philosophy’는 총체적 진리를 구축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스스로를 해체하는 역설적 실천으로 존립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데리다를 위시한 일군의 사상가들은 ‘philosophy’의 생명인 ‘희’의 실천이 해체와 파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알랭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은 이런 상황에 개입하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다. 바디우는 1980년대 말 총체적 진리를 구축하는 지식 체계인 ‘philosophy’에 내려진 사망선고를 철회하기 위해 방대한 기획을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철학에서 말소된 ‘희’의 실천이 철학의 해체나 파괴가 아니라 진리와 주체를 새롭게 구축하는 지적 영위를 통해서만 가능함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바디우는 철학의 역사적 자기 이해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여 망실된 철학의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 시도한다. 그가 ‘존재’에 천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존재’란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시작된 ‘philosophy’의 고유한 물음인데, 그것은 세상의 삼라만상이 ‘있다’는 사태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대답은 간결했다. 바로 “있는 것은 하나”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있는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닌 한에서, ‘존재’란 그 어떤 변화도 모르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 무한히 펼쳐져 있는 수많은 ‘있는 것들’의 ‘있음 자체’는 ‘없음’이 아니기에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에서 말하는 ‘본질’이나 ‘보편’이란 개념의 원형적 사유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데리다를 위시한 이른바 포스트 모던 철학자들은 이러한 ‘본질’이나 ‘보편’이나 ‘동일자=하나’로서의 존재를 해체-파괴하여 수많은 존재자들의 고유성을 회복하려 했다고 볼 수 있는데, 바디우는 존재자들의 고유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데에는 뜻을 같이 하지만 방법에서는 단호히 이들과 길을 달리한다. 이들의 주장이 보편적 진리나 주체를 기초 지우지 못하는 상대주의로 빠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파르메니데스의 ‘하나’와 같은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론에 빠지지 않고 철학이 존재론을 갱생시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바디우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수학에서 전개된 집합론이다. 그는 현대 집합론의 성과들을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존재론에 대한 결정적 전회를 시도한다. 가령 “사과는 과일이다”라고 할 때,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은 개별 사과들일 터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존재론은 ‘개별 사과(존재자)’의 ‘있음(본질-보편속성-존재)’을 과일이란 서술어로 표현해왔다. 바디우는 이런 문장구조로 구성되는 철학적 형이상학의 존재론이 철학으로 하여금 존재를 포착하지 못하게 해왔다고 비판하면서, 현대 집합론의 성과를 참조함으로써 개별 사과들의 다수성이야말로 존재 그 자체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사건이란 이러한 다수성의 존재가 현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은 인간의 언어(‘A는 B이다’를 기본 구조로 삼는)가 결정적 한계를 맞이하는 사태를 말하며, 그 사건이 드러내는 다수성의 존재, 즉 철학적 진리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주체라 설명한다. 즉 주체란 규칙화되고 상식화된 인간의 사유나 언어를 충실히 따라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 규칙과 상식 아래에서 망실된 다수성(존재자들)을 현현시키는 사건에 충실히 함께하는 투사로서의 인간인 셈이다.


이렇듯 바디우는 존재, 진리, 주체 등 철학이 그 태생부터 놓치지 않았던 개념을 해체-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구축하는 것을 통해 ‘philosophy’의 ‘희’를 복원시키려 한다. 그래서 바디우에게 철학은 더 이상 진리를 독점하는 고집스럽고 욕심 많은 앎이 아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인간의 사유와 언어활동에서 규칙과 상식을 정지시키는 사건은 정치, 과학, 예술, 사랑에서 일어나는데, 철학이란 그 네 개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진리를 상호 교통시키는 매개적 앎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디우가 말하는 ‘philosophy’는 오케스트라의 지휘라 할 수 있다. 지휘는 소리를 생산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철학에는 사건이 없다. 다만 그 사건들의 경이로움과 감미로움을 고유성을 훼손하는 일 없이 공존시키는 것이 유일한 임무이다. <존재와 사건>은 분명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이지만, 바디우의 철학이라는 오케스트라 지휘를 감상하기 위해 반드시 감상해야 할 작품이다. 과연 그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리듬이 진리와 주체를 되살아나게 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바디우의 몫이 아니라 각기 고유한 독자들의 몫이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경향신문, 2013.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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