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문학이 있어야 할 자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1-18 13:08 조회20,214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시인 민영은 1934년생이니 올해 팔순이다. 아버지는 가난을 벗어나 보려고 고향 철원을 떠나 만주로 갔고, 그도 네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가 있는 간도 화룡현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쳐, “일본놈 순사한테 두들겨 맞고/ 말없이 흐느껴 울던 불쌍한 아버지”(‘대설(大雪)의 시’)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해방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수난은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얼마 뒤 전쟁이 났고, 그는 피난수도 부산에서 인쇄소 직공으로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소년가장이 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활자 만지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된 것이었다. 선망하는 작가의 글을 원고지로 읽으며 위안을 얻었고, 그 인연으로 사귄 문우들 틈에서 고통을 견디었다. 이윽고 1959년 스물다섯 나이에 그는 시인으로 등단하기에 이르렀다.
올가을 출간된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에는 민영 시인의 이 스산한 인생역정이 곳곳에 밑그림처럼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시집에서 감동을 받는 것은 그가 겪은 역경 또는 역경의 극복 때문이 아니다. 그의 시집에는 세속의 불행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한 예술가의 오연한 정신과 우리말에 대한 긴장된 감각이 팽팽하게 살아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힘든 작업에 비해 소득이 적은 예술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나는 이제껏 불평한 적이 없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동, 유일한 기쁨이었기 때문이다.”(‘시인의 말’) 우리는 이 말에 내포된 시인의 자부심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다. 아마 문학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노동이자 기쁨인 그러한 창조행위의 가능성을 통해 갖가지 형태의 권력욕망이 얼마나 치사하고 허망한 것인지 만인 앞에 드러내는 것일 게다.
오늘 문학이 어떤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지 생각하면서 민영 시인을 떠올린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지난 8일 ‘문학나눔사업’의 존치를 주장하는 문인들의 성명 발표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조금 설명한다면, 그동안 연간 40억원 정도의 복권기금을 지원받아 시·소설·수필·아동도서·희곡·평론 등 여러 분야의 우수한 문학도서를 구입하여 전국의 어린이도서관, 마을문고, 복지시설 등에 보내온 것이 이 사업이다. 과거 유신시대에 만들어진 관변기구로서의 문예진흥원이 예술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되던 시기에 이 사업이 생겨났다는 것도 그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든 이 사업은 상업성이 낮은 순수문학 작품의 출판에 큰 도움을 주었고, 어느 출판인의 증언대로 “문학출판 시장의 최소한의 안전장치”(도서출판 산지니 대표 강수걸) 노릇을 일부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는 내년부터 이 사업을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 학술·교양도서 선정’ 사업에 통합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체부의 설명인즉, 비슷한 성격의 사업을 합쳐야 더 효율적이고 지원금 총액은 오히려 늘어나므로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지난 10월30일 국제펜 한국본부와 한국작가회의 공동성명의 주장처럼 “문학이 한 나라의 문화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탁상공론”일 뿐이다. 가령, 한국연구재단(NRF)에 속한 학술진흥사업을 떼내어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 학술도서 선정’ 사업에 통합하겠다고 하면 누가 이를 수긍하겠는가.
앞서 성명 발표 자리에서 민영 시인은 자신의 1년 원고료 수입이 10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55년째 한 가지 일에 종사해온 사람의 1년 수입을 고백하는 그의 언성에는 그러나 떳떳한 기운이 넘쳤다는 사실을 나는 전하고자 한다. 요컨대 문학인이 요구하는 것은 몇 푼 돈이 아니다. 해당 사업 주관처의 전신이 ‘간행물윤리위원회’인 데서 드러나듯 지원금을 미끼로 문학을 다시 사실상의 검열과 이념적 통제 아래 두려는 저의를 우리는 의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신의 망령을 불러들이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그렇다면 민영 시인이 소리 높이 외친 대로 문학인은 다시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11. 17.)
올가을 출간된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에는 민영 시인의 이 스산한 인생역정이 곳곳에 밑그림처럼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시집에서 감동을 받는 것은 그가 겪은 역경 또는 역경의 극복 때문이 아니다. 그의 시집에는 세속의 불행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한 예술가의 오연한 정신과 우리말에 대한 긴장된 감각이 팽팽하게 살아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힘든 작업에 비해 소득이 적은 예술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나는 이제껏 불평한 적이 없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동, 유일한 기쁨이었기 때문이다.”(‘시인의 말’) 우리는 이 말에 내포된 시인의 자부심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다. 아마 문학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노동이자 기쁨인 그러한 창조행위의 가능성을 통해 갖가지 형태의 권력욕망이 얼마나 치사하고 허망한 것인지 만인 앞에 드러내는 것일 게다.
오늘 문학이 어떤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지 생각하면서 민영 시인을 떠올린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지난 8일 ‘문학나눔사업’의 존치를 주장하는 문인들의 성명 발표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조금 설명한다면, 그동안 연간 40억원 정도의 복권기금을 지원받아 시·소설·수필·아동도서·희곡·평론 등 여러 분야의 우수한 문학도서를 구입하여 전국의 어린이도서관, 마을문고, 복지시설 등에 보내온 것이 이 사업이다. 과거 유신시대에 만들어진 관변기구로서의 문예진흥원이 예술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되던 시기에 이 사업이 생겨났다는 것도 그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든 이 사업은 상업성이 낮은 순수문학 작품의 출판에 큰 도움을 주었고, 어느 출판인의 증언대로 “문학출판 시장의 최소한의 안전장치”(도서출판 산지니 대표 강수걸) 노릇을 일부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는 내년부터 이 사업을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 학술·교양도서 선정’ 사업에 통합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체부의 설명인즉, 비슷한 성격의 사업을 합쳐야 더 효율적이고 지원금 총액은 오히려 늘어나므로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지난 10월30일 국제펜 한국본부와 한국작가회의 공동성명의 주장처럼 “문학이 한 나라의 문화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탁상공론”일 뿐이다. 가령, 한국연구재단(NRF)에 속한 학술진흥사업을 떼내어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 학술도서 선정’ 사업에 통합하겠다고 하면 누가 이를 수긍하겠는가.
앞서 성명 발표 자리에서 민영 시인은 자신의 1년 원고료 수입이 10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55년째 한 가지 일에 종사해온 사람의 1년 수입을 고백하는 그의 언성에는 그러나 떳떳한 기운이 넘쳤다는 사실을 나는 전하고자 한다. 요컨대 문학인이 요구하는 것은 몇 푼 돈이 아니다. 해당 사업 주관처의 전신이 ‘간행물윤리위원회’인 데서 드러나듯 지원금을 미끼로 문학을 다시 사실상의 검열과 이념적 통제 아래 두려는 저의를 우리는 의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신의 망령을 불러들이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그렇다면 민영 시인이 소리 높이 외친 대로 문학인은 다시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11. 1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