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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갑우] 북핵 해결을 위한 '베이징 프로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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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1-18 14:56 조회19,7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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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은 2005년 2월 10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다. 이 성명에서 북한은 "부쉬행정부의 증대되는 대조선고립압살정책에 맞서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단호히 탈퇴하였고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2002년 10월 미국의 대북특사가 북한을 방문하여 고농축우라늄에 의한 핵개발 의혹을 제기한 후, 북한은 2003년 1월 10일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과 "국제원자력기구의 불공정성"을 이유로, "핵무기전파방지조약", NPT(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를 탈퇴했다. NPT를 탈퇴하게 되면, NPT 3조에 규정된 핵안전조치 의무를 준수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핵물질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의 규제 및 사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북한은 NPT를 핵보유국에게는 핵보유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비핵국가들에게는 핵보유를 불허하는 "불평등조약"으로 간주함에도, NPT를 근거로 NPT 밖에 있기 때문에 핵무기를 보유한 것이 "합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2003년 1월 "정부 성명"에서 북한은,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하지만 핵무기를 만들 의사는 없으며," 자신들의 "핵활동은 오직 전력생산을 비롯한 평화적목적에 국한될것이"고, "핵무기를 만들지 않는다는것을 조미사이에 별도의 검증을 통하여 증명해보일수도 있을것이"라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북한의 말을 '액면'으로 수용한다면, 2003년 1월 이후 북한의 정책결정자들은 핵무기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자신들이 마주한 '정세'의 극적 변화가 발생했다고 '생각'한 셈이다.


▲ 2003년 1월 11일 평양에서 핵무기확산방지조약(NPT) 탈퇴 지지 100만명 군중대회가 열리고 있다. 북한은 1993년 3월 NPT 탈퇴를 선언했다가 같은해 6월 미국과 고위급회담 이후 탈퇴를 보류했다. 그러나 2002년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무기개발 의혹을 제기하자 2003년 1월 NPT 탈퇴를 선언하고 공식 탈퇴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은 이 정책전환의 이유로,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및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언급하고 있다. 1994년 10월에 체결된 북미 제네바합의 파기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2005년 12월과 2003년 10월의 북한 조선중앙통신 보도에서, "핵억제력"이 없었다면, "이라크와 같은 처지와 운명을 면할수 없었을것이"고, "미국의 《힘의 정책》, 《핵정책》에 대처한 물리적억제력이 없었다면"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터졌을것이"라는 구절들을 볼 수 있다.


북한이 이라크처럼 석유자원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중국 및 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할 때, 객관적으로 미국이 북한을 침공할 유인은 이라크보다 확률적으로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선언할 때 정당화를 위한 명분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었다. 한반도 비핵화라는 김일성의 "유훈"조차 무시할 정도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북한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중대국면(critical juncture)으로 인식되었을 수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없었다면,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북한이 핵억제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북한이 이라크처럼 되었을 것이다, 라는 반사실적 조건문을 증명할 길은 없다. 그럼에도 북한의 핵무기 보유선언은, 실제 전쟁의 가능성보다 전쟁의 가능성에 대한 정책결정자의 '인식'(perception)을 통해 국제관계의 위기가 구성됨을 보여주는 사례다. 즉 변화된 '정세' 때문에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공표한 문헌을 보면 북한의 핵개발을 정세 탓으로 읽지 않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2005년 9월 19일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교환한 공동성명 이후인 같은 해 12월 북한은 다시금 북미 제네바합의 파기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면서, "핵시설을 폐기하지 않고 유지해온것은 옳은 결단이였"고, "조미기본합의문의 파기와 경수로건설의 완전한 중단은 시간상 문제이라는데 대해 미리 내다보고 시기시기 필요한 자위적조치를 취한 것이 얼마나 선견지명있는 결심이였"는지를 말하고 있다.


미국이 제네바합의를 할 때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생각했다면, 북한은 제네바합의 직후인 1995년 1월부터 적과 적의 위협을 극단적인 군사적 방법으로 대처하는 안보담론의 한 형태인 '선군정치'를 시작했다. 북한은 제네바합의의 실행과정에서 핵무기 개발을 위한 시설을 유지하고 있었고, 2002년 10월 제네바합의가 붕괴되는 조짐을 보이자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세의 개입이 있기는 했지만, 냉전의 해체 이후 미국 단극패권시대에 정치경제적 생존의 위기를 겪으며 배태된 북한의 정책결정자들의 '성향'을 핵무기 개발의 원인이라 추론할 수도 있다.


북한의 정책결정자들은 자신들의 핵개발을 정세 탓으로 돌리곤 한다. 예를 들어, 북한은 "비핵화를 념원하고있는 우리 공화국을 핵무기보유에로 떠민 당사자는 다름 아닌 미국이"라 말한다. 반면 미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은 북한의 정책결정자들의 성향을 핵무기 보유의 원인으로 해석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적으로 간주하는 세력이 기대와 달리 긍정적 행동을 할 때는 정세를 그 행동의 원인으로, 그 반대로 기대한 것처럼 부정적 행동을 할 때는 성향 때문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1) 즉 북한이 적인가 아니면 친구인가 또는 최소한 친구가 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정체성의 정치에 따라 북한의 핵보유 원인은 성향 또는 정세로 귀결될 수 있다. 무엇을 원인으로 보느냐에 따라 현재적 시각에서 미래예측이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정세는 변수지만 성향은 상수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2.
북한은 핵무기 보유를, "어디까지나 자위적핵억제력"이라고 주장한다. 스스로 핵억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억제력 확보의 시작이기는 하지만, 방어적이든 공격적이든 핵억제력은 선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핵억제력이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2) 첫째 물리적 '능력'이 확보되어야 한다. 상대방 공격의 예방은 물론 공격을 응징할 수 있는 물리적 능력은 핵억제력의 필요조건이다. 핵실험, 핵운반체 실험, 핵탄두의 소형화와 경량화 등이 필요한 이유다. 북한은 이 물리적 능력을 시현하며 플루토늄 원자폭탄을 개발했고, 북한에 다량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우라늄 농축을 통해 또 다른 핵무기를 만들려 하고 있다.


둘째, 핵억제력은 억제의 대상인 상대방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즉 상대방이 핵능력과 공격이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초래할 수 있음을 수용해야 한다. 따라서 핵억제력의 인정은 갈등하는 국가들의 협력을 의미할 수 있다. 북한은, 게임이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핵위협이라는 값비싼 신호를 보내, 협력을 유도하는 '인정투쟁'을 계속하고 있지만, 미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은 북한의 핵억제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셋째, 핵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결의'를 보여야 한다. 핵억제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주체는 낮은 수준의 분쟁에서 단호함을 보임으로써 핵억제력을 증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분쟁에서 보여준 결의가 핵억제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자위적 억제력이라도 핵위협을 신뢰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현재에서 미래까지 자신들이 단호했고 단호하며 단호할 것이라는 신호를 상대방에게 보내야 한다. 즉 핵억제력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자신들의 결의는 단호하게 일관되어 있다는 '평판'을 상대방이 갖게 해야 한다. 따라서 핵무기를 보유한 행위주체는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의 신빙성이 낮다는 것을 알지만, 핵위협을 실천에 옮길 수도 있다는 결의를 상대방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부담'을 가지게 된다.


특히 북한처럼 작은 수의 핵무기를 가진 수정주의 국가는, 적이 단호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억제력이 적절하게 기능한다면 대량의 핵무기 보유 및 군비경쟁을 필요 없게 만들고 위기와 대결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3) 더불어 북한과 같이 작은 수의 핵무기를 가진 국가는 저비용 고효율의 핵억제가 이루어진다면 자원을 경제로 재배치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자평할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수의 핵무기는 억제의 대상에게 제거의 유혹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작은 수의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는 그 숫자가 주는 잠재적 취약성 때문에 그 무기를 사용하거나 또는 포기하려 할 수 있다. 작은 숫자의 핵무기를 가진 핵억제력의 역설이다.


3.
북한은 김정은의 권력승계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2012년 2월 29일 미국과 다시금 2005년 9·19공동성명으로 복귀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합의에 도달했다. 2·29합의의 주요 내용은, 9·19공동성명의 이행, 미국의 영양지원, 미국의 대북제재에서 민수분야의 제외, 6자회담의 재개 이후 경수로 제공 논의, 북한의 핵시험과 미사일발사 그리고 우라늄농축 활동의 임시정지, 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허용 등이었다.(4)


이 합의에서 북미는 "관계를 개선하며 비핵화를 실현해나가는것이" 양국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대화를 지속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2008년 12월 이후 6자회담이 중단된 상태에서 다시금 북한의 핵억제를 억제하는 비핵화가 의제로 상정된 것이다.(5) 미국은 2012년 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북한의 도발과 핵문제가 악재로 작용하는 것을 예방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김일성의 유훈인 비핵화는, 평화체제의 수립과 연계되어 있기는 했지만, 북한도 동의하는 의제였다.


그러나 2012년 3월 16일 북한의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김일성동지의 탄생 100돐을 맞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자체의 힘과 기술로 제작한 실용위성을 쏘아올리게 된다"는 발표를 하게 되면서 2·29합의는 실행단계에 진입하지 못하고 좌초할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북한이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이 포함된 4월 12일부터 16일 사이에 운반로켓 "은하-3"을 통해 지구관측위성 "광명성-3호"를 발사하겠다고 하자, 미국은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면 북미합의가 파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실상의 핵운반체 실험에 대한 미국의 반발이었다.


이 충돌은 해명되어야 할 쟁점이다. 북미의 협상자들은 북미회담에서 로켓 발사가 논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북한은 회담 과정에서 김일성 탄생 100주년이 되는 시점에 인공위성을 발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은 북한이 비공식적이지만 위성 발사를 중단하겠다고 말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2012년 3월 27일 북한 외무성은 위성발사와 2ㆍ29합의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주장을 개진했다.


"평화적위성발사가 장거리미싸일발사 림시중지에 포함되지 않는다는것을 시종일관하게 주장하였다. 그 결과 2.29조미합의에는 《위성발사를 포함한 장거리미싸일발사》나 《탄도미싸일기술을 리용한 발사》가 아니라 《장거리미싸일발사 림시중지》로 명기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북미 어느 측의 말이 맞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 진위공방은 북한의 핵정책에 있어 분수령적 사건일 수 있다. 북한은 그 이후, 비핵화라는 의제에서 이탈하려 하고 있다.


실용위성 발사를 "김정일의 유훈"이자 "경제발전의 필수적요구"로 정리한 북한은 미국이 식량 지원의 중단을 발표하자, 2012년 3월 31일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미국이 북한의 로켓 발사를 "미싸일방위체계수립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가고 있는 길은, "조선반도뿐아니라 동북아시아지역에서 평화와 안정을 해치고 새로운 랭전을 불러오"고 있다는 담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4월 7일 미국 국무부 관계자가 괌에서 출발한 특별기를 통해 평양을 방문하여 로켓 발사의 중지를 요구했다. 북한은 이 회동에서 인공위성의 발사를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미국의 11월말 대통령선거 전까지 핵실험과 같이 선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2012년 4월 11일 조선로동당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당 제1비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의 지위를 차지한 후, 4월 13일 북한은 광명성-3호를 발사했다. 그러나 위성발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북한은 실패를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같은 날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김정은은 국가의 "최고령도자"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북한은 4월 13일 사회주의헌법의 수정보충을 통해 "김일성-김정일헌법"을 만들고 전문에 김정일의 업적으로 "핵보유국"을 명문화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북미의 비공식접촉은 지속되었지만, 북한은 이 시기에 "조선반도비핵화가 요원해지고 있다", "핵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을수 없다"(7월 20일)는 발언을 했다.


2012년 8월 31일 북한 외무성은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은 조선반도핵문제해결의 기본장애"라는 제목의 비망록을 발표했다. 이 비망록에서 북한은 "위성을 쏴올리는 운반로케트나 탄두를 나르는 미싸일이나 그 추진기술이 류사한것은 사실"임을 인정하면서, 즉 위성 발사가 미국까지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는 실험이 될 수도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미국이 다른 국가의 위성 발사를 미사일 발사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6자회담의 9ㆍ19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원칙도 미국의 "대조선적대관념"이 해소되지 않는 한 작동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에게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대조선적대시정책을 포기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 적대시정책을 계속 유지하고 그에 대처하여 우리의 핵무기고가 계속 확대강화되는것"이다. 만약 후자의 길로 가게 될 경우, 북한은 핵보유가 "부득불 장기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핵보유가 전술이 아니라 전략이란 해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핵보유의 "장기화"가 이 비망록의 잠정 결론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선거 직전인 2002년 12월 12일 북한은 위성 발사를 다시 시도했고, 위성은 정상적으로 궤도에 진입했다. 이후 국제제재 논의가 진행되는 와중에 북한 외무성은 2013년 1월 14일 김정은정권 외교정책의 기조가 될 수도 있는 비망록을 발표했다. 이 비망록에서 북한의 외무성은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를 의제화했다. 비핵화 또는 비핵지대화가 생략된 채 유엔군사령부의 해체와 평화협정을 연계한 것이다. 이 비망록의 골자는, 미국이 아시아로의 복귀를 담은 새로운 국방전략에서, "《유엔군사령부》를 《다국적련합기구》로 둔갑시켜 아시아판 나토의 모체로 삼으려 하고있다"는 것이었다. 즉 북한은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를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의 폐기 및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평화와 안정과 연관된 지표로 설정했다. 핵억제력을 인정받으며 평화체제를 논의하려는 것이 북한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2013년 1월 2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에 대해 대북제재 결의 2087호를 채택하자, "세계의 비핵화가 실현되기 전에는 조선반도비핵화도 불가능하다는 최종결론"에 도달했고, "6자회담 9ㆍ19공동성명은 사멸되고 조선반도비핵화는 종말"을 고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제재에 대응하여 북한은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했다. 핵실험 이후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를 통해 핵무기의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를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운반체 실험, 핵실험, 핵탄두의 소형화로 이어지는 핵억제력의 확보를 위한 물리적 능력의 강화였다. 핵실험 이후 북한 외무성은 "자위적인 핵억제력에 의거하여 경제건설과 인민생활향상에 힘을 집중하려던것이 우리의 목표였다"라고 주장하면서, 핵보유를 경제적 측면에서 정당화했다.


▲ 지난 2월 12일 북한 조선중앙TV는 3차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



2013년 3월 7일 다시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가 채택되고, 3월 5일부터 시작된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한 북한의 반발이 증폭되면서, 동북아의 불안정을 야기하는 '북미갈등-한미협력-남북갈등'의 악순환이 다시 시작되었다. 북한은 남북한의 불가침과 비핵화에 관한 합의의 폐기를 선언했고, 판문점 연락통로를 폐쇄했다.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의 영구화"와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면서, 3월 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을 병진"하는 노선을 공표하게 된다. 2012년 8월 비망록에서 핵보유의 "부득불 장기화"를 언급했던 북한은 단호한 결의의 표현으로 핵보유의 "영구화"로 그 강도를 높였다. 북한은 "병진로선"을 "항구적으로 틀어쥐고나가야 할 전략적 로선"으로 설정한 상태다. 1962년 김일성의 병진노선을 불러오는 방식으로 새로운 병진노선을 국내적으로 정당화한 북한은, 병진노선이 "국방비를 늘이지 않고도 적은 비용으로 나라의 방위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경제건설과 인민생활향상에 큰 힘을 돌릴수 있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3년 4월 1일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자위적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데" 대한 법령을 채택했다. 헌법 전문에 핵보유국을 지위를 넣은데 이어 핵보유를 국내법으로 "영구화"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주요 내용은, 미국의 핵위협에 맞서는 "정당한 방위수단"으로서의 핵무기, "세계의 비핵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핵무력"의 유지, "핵억제력과 핵보복타격력"의 강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 핵사용 결정, 핵확산 금지, "핵보유국들과의 적대관계가 해소되는데 따라" "핵전파방지와 핵물질의 안전한 관리를 위한 국제적인 노력에 협조", "핵군축을 위한 국제적인 노력"에 대한 지지 등이다. 이 법령은 세계의 비핵화가 실현될 때까지 핵억제력을 유지하지만, 핵확산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읽힌다. 즉 핵확산이라는 경계선을 넘지는 않겠다는 것이고, 핵확산을 의제화하여 사실상 핵억제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법령은 또한 핵비확산, 핵물질 관리, 핵군축 등을 의제화하겠다는 의사의 표현이기도 했다.


북한은 핵억제력에 필요한 결의를 핵무기의 영구화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 다져 나가고 있지만, 이 결의의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2013년 3월 김정은 당중앙위원회 "보고"에서, "경제강국건설을 다그치고 인민생활을 획기적으로 높이는것은 현시기 우리 당앞에 나서는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과업"이지만,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경제발전을 이룩할수 없다고 위협공갈하는 동시에 다른 길을 선택하면 잘살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회유"는 거부한다고 말한 바 있다.


2013년 상반기의 '정세'가 병진노선을 추동한 측면이 있지만, 북한 특유의 안보담론에 기초한 자력갱생의 '성향'이 병진노선을 걷게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국내적으로 기술혁신과 기업의 독립경영제 도입 등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지만, 김정은은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로선을 관철하는데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대외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려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엔제재에도 불구하고 "대외무역을 다각화, 다양화"해야 한다는 당위적 진술과 지하자원을 개발하여 자금문제를 해결하자는 정도다.


김정은정권의 출범 이후 북한의 대외경제정책의 변화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다자주의(multilateralism)를 국제법사전(2002)의 항목에 포함시키지 않을 정도로 다자안보협력 및 다자경제협력을 선호하지 않았던 북한의 동북아 경제협력에 대한 구상이다. 북한도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경제적번영을 공동으로 이룩해나가기 위한 노력"이 자신의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6) 북한이 설정하는 동북아론의 두 축은 '북중협력'과 '남북관계'다. 북한은 이 두 축이 핵억제력과 상관없이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핵억제력의 직접 상대방들이다. 북중경제협력 지대로 선택된 라선, 황금평, 위화도의 개발에서 중국은 속도조절을 하고 있고, 한국정부는 북한의 병진노선을 비판하며 개성공업지구를 제외한 남북협력을 핵문제와 연계하고 있다. 북한의 핵억제력은 자본축적의 원천이 될 대외경제관계를 "연구를 깊여야 할 문제"로 만들고 있다.


4.
2013년 상반기를 지나며 북한은 핵보유의 "영구화"로 방향을 잡은 듯하다. 핵억제력의 확보를 위해 핵능력을 강화하고 있고,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국면에서 국내적, 국제적 결의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핵국가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도 계속하고 있다. 만약 북한이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핵우산을 포함한 확장억제의 강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남한이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을 무력화하기 위해 준비하는 킬체인과 미사일방어체제를 자신들의 핵억제력에 대한 대응이자 인정으로 생각한다면, 한반도와 동북아는 안보딜레마가 심화되는 치킨게임에 빠져들게 된다.


치킨게임은 끝까지 갈 경우 충돌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어느 한 편이 겁쟁이가 되어 끝이 나지만, 다음 게임에서는 수모를 당한 겁쟁이가 복수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북한의 인정투쟁의 한 형태인 치킨게임이 반복된다면, 북한의 병진노선은 김정은의 기대와 달리 김일성이 과거에 시인했듯 "국방공업을 건설하는데 자금과 자재를 많이 돌리"게 되어 "경제건설과 함께 국방건설을 힘있게 밀고나가"기 어려운 정책이 된다.


따라서 북한은 핵억제력을 묵인해줄 수 있는 대화에 대한 유인을 가진다. 2013년에 들어서 핵억제력의 능력과 결의를 보여준 북한으로서는 대화가 재개된다면, 재개 자체를 핵억제력의 인정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2013년 5월 중국을 방문한 북한군 총정치국장 최룡해는 중국의 시진핑을 만나 2008년 12월 이후 중단된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사실상 동북아질서 재편을 위한 '베이징 프로세스'인 6자회담 의장국가 중국도 동북아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북한을 결박하고 친미화(親美化)를 막기 위해 기존 제도인 6자회담을 필요로 한다.


북한은 2013년 중반부터 미국과 비공식대화를 재개했다. 미국은 아시아로의 복귀 이후 한미, 미일동맹의 강화라는 세력균형정책을 구사하고 있고 북한의 핵억제력은 미국의 동북아정책에 유용한 명분이 되지만, 미국은 북한의 핵확산 및 친중화(親中化)를 전략적 손실이라 생각할 것이다. 북미관계가 악화되면 북한은 중국에 편승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스스로 동북아 경제협력의 한 축이라 생각하는 남한과도 2013년 8월, 2013년 4월 북한의 당중앙위원회 비서인 김양건이 직접 폐쇄를 지시한 개성공업지구의 재가동에 합의했다.

문제는 전제조건과 의제다. 새롭게 시작되는 '베이징 프로세스'는, 동북아의 유일한 비핵국가이자 이해당사자가 아닌 제삼국 몽골에서 개최되는 '울란바타르 프로세스'라면 더 좋겠지만,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교환한 2005년 9·19공동성명으로의 복귀를 수사로 사용할 것이다.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면, 북한은 핵억제력의 확보를 위해 사용한 핵능력 강화조처들을 유예하는 2·29합의의 실행을 제시하거나 아니면 인공위성 발사를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NPT 복귀를 선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베이징 프로세스'가 9·19공동성명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갈등당사자들을 협상의 장에 모으는 것은 물론 협상과 합의의 실행과정에서 첨예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이익갈등을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전환의 계기는, 미중, 중일, 북미, 북중, 북일, 남북 등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미래의 이익을 구성하는 담론에서 온다. 그 미래의 기억은 비확산과 비핵화를 넘어서는 의제다. 양자들이 공유할 기억과 더불어 남북미중일러가 함께 할 수 있는, 세력균형을 넘어서는 동북아 질서, 예를 들어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체제 구상이 필요하다.



□ 필자주석


1. 국제정치에서 정세와 성향과 관련한 심리학적 논의는, J. Mercer, Reputation & International Politic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6).


2. 핵억제론은, P. Morgan, Deterrence Now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Merecer, Reputation & International Politics의 주요 내용을 필자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3. 미국의 대표적인 방어적, 공격적 현실주의자들—월츠(K. Waltz)와 미어세이머(J. Mearsheimer)—이 핵확산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도 핵억제에 의한 세력균형이 국제체제의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북아지역에서의 핵도미노는 이 이론가들의 예측과 달리 불안정을 심화시킬 것이다. 이근욱, <왈츠 이후: 국제정치이론의 변화와 발전>(파주: 한울, 2009), pp. 45-46, 92-93.


4. 그러나 북한이 조선통신 웹사이트를 통해 발표한 영문보도문과 미국 국무부 대변인의 발표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첫째, 미국측 발표에는 "평화협정이 체결되기전까지"(until the conclusion of a peace treaty)란 표현이 없다. 둘째, 6자회담이 재개되면 북한에 대한 제재의 해제와 경수로의 제공을 논의하겠다는 구절이 미국측 발표에는 없다. 셋째, 미국은 북한에 대한 영양지원에서 "강도 높은 모니터링"(intensive monitoring)을 언급했지만 북한측 발표에는 이 부분이 없다.


5. 북한은 2011년 10월 김정일이 러시아의 이타르타스 통신에 보낸 서면 인터뷰 자료에서 6자회담의 재개입장을 밝힌 바 있었다. 이 자료에서 김정일은 "조선반도의 비핵화"가 김일성의 유훈임을 다시 강조했다.


6. <조선신보> 2012년 11월 8일.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소장 이수훈)가 발행하는 <한반도포커스> 2013년 11·12월호(제26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번 호의 전체 주제는 '북핵 문제의 점검과 전망'입니다.

* 원제 : 북한의 핵억제담론의 심리학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프레시안, 2013.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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