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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지퍼-왜 저리 굳게 닫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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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1-22 15:20 조회19,7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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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로 끼워진 옷이 안쪽 틈새를 살짝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이 사물로 채워진 옷의 내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옷 안쪽을 숨긴 채 서로 맞물려 있는 이 사물의 촘촘한 이빨들에 집중해 보자. 흡사 옷에 부드러운 톱니바퀴를 박은 듯하다.


`지퍼`는 옛날부터 옷을 여미는 데 만능으로 쓰이던 단추를 대체한 현대적 사물이다. 물론 `정장`에서는 여전히 단추를 고수한다. 이 상황을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라는 관점에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드리야르 같은 현대철학자라면 `단추`는 지퍼 세계의 `외부`가 아직 존재한다는 환상을 심기 위한 현대성을 가장한 은폐술이라고 말할 것이다.


옷 안쪽을 견고하게 은폐하는 형상은 이 사물의 본질을 지시한다. 지퍼를 채운 옷 바깥 면은 문화적 페르소나를 쓰고 사회를 마주하고 있다. 반대로 지퍼 안쪽 면은 물리적으로 신체인 피부와 맞닿아 있는 `사적인` 공간이다.


현대성은 사적 공간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공적인 삶을 영위하면서도 늘 완고하게 자기 세계를 분리시키려는 투쟁의 산물이다. 이미지 관점에서 보면 가방에 지퍼를 쓰는 것은 물건이 쏟아지지 않게 하려는 효용성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단추나 매듭과는 달리 지퍼로 잠긴 견고한 가방은 내용물을 완벽히 가린 `블랙박스`다. 지퍼로 잠긴 가방은 개인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성을 주장하는 이미지를 하고 있다. 철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 관점에서도 `개인`은 현대성 그 자체다. 지퍼를 이러한 현대적 삶의 절단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점에서 지퍼를 반쯤 내린 상대방 점퍼에서 느끼는 `야성미`는 현대에서는 특이한 심상(心象)을 드러낸다. 이 기분 상태의 실제 무의식은 육체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타인의 은폐된 사적 공간을 은밀히 훔쳐보는 관음증과 더 관련이 있다.

`훔쳐보기`의 욕망은 빈틈없이 닫힌 사물일수록 더 크다.

거의 모든 옷에서 지퍼가 한가운데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현대성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있다. 지퍼는 타인 눈에 가장 쉽게 포착되는 자리에서 가장 완강하게 닫혀 있는 사물인 것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매일경제, 201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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