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핵 위협을 안고 사는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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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1-22 15:25 조회20,0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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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 개발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우리 같은 보통사람으로서는 알기 어렵다. 그들의 주장대로 핵보유국 반열에 든 게 사실인지, 아니면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어느 쪽이든 핵무기의 존재는 남한 국민뿐 아니라 한반도 주민 전체의 운명에 중대한 위협이다. 따라서 한반도를 ‘핵 없는 지대’로 만드는 것은 당연히 절실한 과제다. 그런데 이 땅에는 핵무기 못지않은 핵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잊고 지낸다. 일상생활 속에 너무나 깊이 침투해 있어서 우리 자신의 삶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게 되어버린 존재, 곧 핵발전이 그것이다.
지난 14일 국무회의는 2035년까지의 에너지정책 방향을 담은 ‘제2차 에너지기본계획’을 심의 확정했다. 이 계획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전력설비에서 차지하는 원전 비중을 현재의 26.4%에서 2035년까지 29%로 높인다는 것, 그 결과 “현재 보유하고 있는 원전 23기 외에 건설 중이거나 건설 계획이 나와 있는 11기를 더 짓고도 추가로 최소한 5기의 신규 원전 건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한겨레> 1월15일치) 이 결정이 우리의 미래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칠지, 또 심각한 만큼 정책 결정 과정에 국민의 의사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정해진 절차를 따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12년에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심의가 있었고, 작년에는 에너지 전문가들의 모임인 ‘민관 워킹그룹’의 검토와 국회 상임위의 공청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만의 요식행위’가 아니라 국민적 이해관계를 충실히 수렴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2011년의 후쿠시마 원전 재앙이 우리 국민에게 방사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본산 식품의 기피 같은 개인적 차원의 방어 형태를 넘어 원전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정치와 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 직후 방사능 불안이 고조되자 당시 대통령 이명박은 편서풍 타령을 하며 사태의 본질을 외면했고, 독일 같은 나라의 탈핵 결정을 비웃듯 원전 수출에 나섰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 그렇듯이 원전 분야에서도 국민의 민주적 통제가 맥을 못 추는 까닭은 재벌·관료·학자 등 소위 전문가 그룹에 의해 진실이 은폐되기 때문이고 언론이 제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국대 의대 김익중 교수의 <한국 탈핵>을 읽고 많은 것을 배웠다. 전문적인 내용임에도 보통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서술한 그 책에서 조금만 옮겨보겠다.
핵폭탄에서는 엄청난 열과 폭풍이 순간적으로 발생한다. 반면에 원전 사고는 열과 폭풍의 발생이 없는 대신 핵폭탄보다 수천배나 더 많은 방사능을 내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지금 사람이 살고 있지만 체르노빌에서는 앞으로 수백년 동안 사람이 살 수 없다. 일본 땅 전체의 70% 정도가 세슘으로 오염되었는데, 이 오염은 앞으로 약 300년간 지속될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다섯째로 원전이 많은 나라이고 땅 넓이에 대한 원전 비율, 즉 원전 밀집도에서는 벨기에와 1, 2위를 다툰다. 이것은 핵 사고 확률에서 앞 순위일뿐더러 사고가 초래할 위험도에서도 한국이 수위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한국은 원전 비리가 많은 나라다. 불량품, 중고품, 검증서 위조 부품, 시험성적서 위조 부품 등이 납품되었고 관계기관 간부들이 비리 혐의로 구속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핵 사고의 확률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원자력은 값싼 에너지라고 하지만, 2011년 현대경제연구원의 ‘원전의 드러나지 않은 비용’이라는 보고서는 사고 발생 위험 비용, 원전 해체 및 환경 복구 비용, 사용후 핵연료 처리 비용 등이 제대로 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한국처럼 원전을 새로 짓고 있는 나라가 있는데도 1989년 이후 세계 전체로는 원전이 늘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원전은 사양산업이고 세계는 이미 탈핵으로 가고 있다. 많이 늦었지만 우리도 에너지정책을 바꿔야 한다. 탈핵은 결코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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