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경] “4대악 보험”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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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2-17 17:49 조회19,36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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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가정폭력·학교폭력·불량식품 등 4대 사회악 척결이 현 정부의 핵심 공약이다 보니 관련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4대악 근절을 위한 범시민연합도 구성되고, 각종 안전장비를 전시하는 박람회가 개최되는가 하면 4대악 피해 보상 보험 상품까지 출시한다고 한다. 4대악 피해의 대상이 되기 쉬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취약 계층에 대해서는 국가가 보험료를 부담하는가 하면, 일반인들이 가입 가능한 상품도 따로 내놓는단다. 보험의 사회안전망 기능을 활용하여 4대악으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거나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되는 것을 막아주고, 정신적 피해까지 보상하여 주겠다는데 유감이 드는 것은 왜인가.
어느 보험이든 모든 불운을 막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피해를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4대악 보험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우선 그 피해의 성격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보험을 예로 들어 보자. 차량을 소유하고 운전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자동차보험을 들게 되어 있는 것은 결국 운전을 하는 한 사고란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며, 적어도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이유 그 자체만으로 사회적 낙인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에 비해 4대악의 경우에는 피해의 범위와 대상을 정의하기도 쉽지 않지만, 일상이 무너지고 자신이 알던 세계가 해체되는 피해를 양적으로 측정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더구나 가정폭력의 책임이나 성폭력의 유무를 입증하는 것 자체가 법정에서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친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심각한 학대가 가해지는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가해자에게 어린아이를 돌려보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어디 한두 사건인가. 성폭력이나 학교폭력임이 명백한 상황에서도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장래를 생각해서 한번만 봐달라는 읍소에 시달리고 또 시달리다가, 합의하지 않으면 그 후에는 신상이 털리고 인신공격이나 허위 사실 유포 및 협박에 노출되는 일마저도 드물지 않다. 경찰이나 검찰, 심지어는 피해자의 치료를 담당한 의료기관에서까지 2차 피해는 발생한다. 이제 공공기관도 아닌 보험사까지 끼어든다면 보험금 지급을 둘러싸고 피해자가 맞느니 안 맞느니, 피해를 입증해 보라느니 할 것은 뻔하다.
사실 4대악 중에서 불량식품이 좀 혼자 튀는 감이 있지만 나머지 폭력 문제들이 그렇게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된 데는 이러한 폭력이 발생하는 사회관계의 불평등에 눈을 감아왔던 탓이 크다. 사회가 가해자에게는 관대하다가도 피해자에게는 오히려 당할 만해서 당한 것 아니냐며 책임을 묻는가 하면, 학교나 가정 혹은 일터에 깊이 자리한 권력의 문제는 그대로 두고 그저 약자의 입을 막아서 겉으로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이제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보험을 통한 피해 보상의 가능성을 더욱 회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한국에서 산재보험이 운영되고 있는 방식이다. 삼성전자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 인정을 받았다고 승리를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산재보험이라는 것은 업무 관련성에 대한 개연성만 입증이 되면 회사의 과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빨리 지급함으로써 노동자와 회사를 동시에 보호하고자 하는 보험이다. 그러한 산재보험조차 회사더러 책임지라는 것도 아닌데 일일이 소송을 거쳐서야 보험금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폭력의 피해자들이 피해를 보상받는 길은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 더구나 성폭력이나 학교폭력, 가정폭력은 이제 누구나 보험을 들어야 할 만큼 교통사고와 마찬가지의 일상 속에서 피할 수 없는 흔한 사고임을 정부가 나서서 인정하자는 것인지 참담할 따름이다.
백영경 방송통신대 교수·문화인류학
(한겨레, 201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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