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엽] "야만적인 근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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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2-26 16:51 조회19,31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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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작가는 심하게 당황하고 문학평론가는 지독한 오독이라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그래도 며칠 뒤면 취임 1년이 되는 박근혜 정부 아래서의 경험에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자꾸만 겹쳐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빌어먹을”, “제기랄” 이런 말로는 성이 차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씨바”, 이렇게 약간 순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욕설이 조금씩 언어적 시민권을 획득해온 듯싶다. 탐욕을 지나 야만성이 뚝뚝 묻어나오는 정치에 대해 진지하고 단정하게 말하는 것이 자기정화의 고된 노력 없이는 어렵게 된 세상 탓 아니겠는가? 마침내 작가 황정은이 문턱을 넘었다. 그녀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의 언어적 주권을 욕에 대해서도 유감없이 그리고 창의적으로 행사했다. 욕을 분석적인 어휘로 만들어 인간의 행태와 심리의 어떤 극한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까지 끌고 간 것이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주인공 앨리시어에겐 폭력적인 엄마가 있다. 앨리시어 엄마의 아비는 매질이 상습적인 사람이었고, 어미는 “기생들과 즐기고 놀다 돌아온 가장이 신문지에 싸서 가져온 쇠고기나 꿩고기로 고깃국을 끓여 식구들이 모두 앉아 그것을 먹을 때” 배부르고 평온한 여자였다. 이런 부모 아래서 자란 앨리시어의 엄마는 아비의 폭력성을 물려받았다.
앨리시어 외할아버지의 모습, 낯설지 않다. 새벽에 쿵쿵거리며 물건 깨지는 소리를 내는 이웃집이 그렇고, 아들을 대신해 술집 종업원을 폭행한 재벌 회장님이 그렇고, 정적은 물론이고 무고한 이들마저 수없이 고문하고 죽였던 대통령도 그렇다. 그러니 앨리시어의 엄마 또한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동사무소에서도 강남 백화점에서도 청와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엄마는 뭐가 유별나게 거슬리면 앨리시어의 동생을 마당으로 끌어내서 몸을 밀치고 당기며 화를 낸다. 그녀는 “그럴 때가 있고 그럴 땐 멈추지 않는다. 그럴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된다. 달군 강철처럼 뜨겁고 강해져 주변의 온도마저 바꾼다. 씨발됨이다. 지속되고 사고되는 동안 맥락도 증발되는, 그건 그냥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이다.”
황정은 덕에 그리고 황정은을 빌려 이렇게 따옴표 안에 넣고서야 쓰고 있다만, 지난 1년을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라는 말보다 더 잘 요약할 수 있을까?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선거개입 의혹이 불거지자 대통령과 여당 의원들은 “어떤 사람이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되었다. 10·4 정상회담 회의록을 흔들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몇 달이나 내지르고, 원조 유신 검사 김기춘을 기용하고, 검찰총장을 찍어내고, 국회의원을 내란음모 사건으로 기소할 뿐 아니라 정당 해산마저 청구하고, 김용판에겐 무죄를 선고하고, 이석기에겐 12년을 선고하는 “씨발됨”을 보였다. 공약이란 공약은 죄다 내던지고 공유자산을 사유화하기 위한 민영화는 그것대로 끈기 있게 추진하면서 말이다.
며칠 전 강기훈씨가 23년 만에 유서대필 누명을 벗었다. 재심 판결 직후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사건 당시 검사와 재판부의 사과를 바랐다. 너무도 늦은 무죄 판결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고 남은 과제는 이들에게 사과를 받아내는 것뿐일까? 아니다. 박근혜 정부 아래 산다는 것은 국가기관의 선거부정에 대한 특검은 고사하고 국회 특위조차 유야무야된다는 것, 그리고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에서의 검찰 쪽 엉터리 증인과 증거 위조에서 보듯이 지금도 강기훈씨 같은 사례들이 제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저선이 없는 이 상태야말로 야만 혹은 “씨발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14. 2. 18.)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주인공 앨리시어에겐 폭력적인 엄마가 있다. 앨리시어 엄마의 아비는 매질이 상습적인 사람이었고, 어미는 “기생들과 즐기고 놀다 돌아온 가장이 신문지에 싸서 가져온 쇠고기나 꿩고기로 고깃국을 끓여 식구들이 모두 앉아 그것을 먹을 때” 배부르고 평온한 여자였다. 이런 부모 아래서 자란 앨리시어의 엄마는 아비의 폭력성을 물려받았다.
앨리시어 외할아버지의 모습, 낯설지 않다. 새벽에 쿵쿵거리며 물건 깨지는 소리를 내는 이웃집이 그렇고, 아들을 대신해 술집 종업원을 폭행한 재벌 회장님이 그렇고, 정적은 물론이고 무고한 이들마저 수없이 고문하고 죽였던 대통령도 그렇다. 그러니 앨리시어의 엄마 또한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동사무소에서도 강남 백화점에서도 청와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엄마는 뭐가 유별나게 거슬리면 앨리시어의 동생을 마당으로 끌어내서 몸을 밀치고 당기며 화를 낸다. 그녀는 “그럴 때가 있고 그럴 땐 멈추지 않는다. 그럴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된다. 달군 강철처럼 뜨겁고 강해져 주변의 온도마저 바꾼다. 씨발됨이다. 지속되고 사고되는 동안 맥락도 증발되는, 그건 그냥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이다.”
황정은 덕에 그리고 황정은을 빌려 이렇게 따옴표 안에 넣고서야 쓰고 있다만, 지난 1년을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라는 말보다 더 잘 요약할 수 있을까?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선거개입 의혹이 불거지자 대통령과 여당 의원들은 “어떤 사람이기보다는 어떤 상태가” 되었다. 10·4 정상회담 회의록을 흔들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몇 달이나 내지르고, 원조 유신 검사 김기춘을 기용하고, 검찰총장을 찍어내고, 국회의원을 내란음모 사건으로 기소할 뿐 아니라 정당 해산마저 청구하고, 김용판에겐 무죄를 선고하고, 이석기에겐 12년을 선고하는 “씨발됨”을 보였다. 공약이란 공약은 죄다 내던지고 공유자산을 사유화하기 위한 민영화는 그것대로 끈기 있게 추진하면서 말이다.
며칠 전 강기훈씨가 23년 만에 유서대필 누명을 벗었다. 재심 판결 직후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사건 당시 검사와 재판부의 사과를 바랐다. 너무도 늦은 무죄 판결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고 남은 과제는 이들에게 사과를 받아내는 것뿐일까? 아니다. 박근혜 정부 아래 산다는 것은 국가기관의 선거부정에 대한 특검은 고사하고 국회 특위조차 유야무야된다는 것, 그리고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에서의 검찰 쪽 엉터리 증인과 증거 위조에서 보듯이 지금도 강기훈씨 같은 사례들이 제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저선이 없는 이 상태야말로 야만 혹은 “씨발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14.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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