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한국 인권의 국제적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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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1-18 13:35 조회19,69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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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퀴즈 하나. 덴마크, 벨기에, 오스트리아, 싱가포르, 프랑스, 핀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영국의 공통점은? 유엔 인간개발지수에서 한국보다 순위가 낮은 나라들이라는 점. 한국이 이들을 제치고 세계 12위를 차지한 것은 놀랄 만한 결과다. 퀴즈 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인 나라, 세계 150개국 중 연간 노동시간 1위에 출산율은 146위인 나라, 세계경제포럼의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서 136개국 중 111위를 차지한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같은 나라가 이처럼 상반되는 측면을 어떻게 동시에 가질 수 있는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국은 국제무역으로 세계 7위, 외환보유액 세계 7위, 세계은행이 조사한 기업환경으로 세계 7위, 법적 분쟁해결 세계 2위, 전기연결 세계 2위, 휴대폰 출하량 세계 1위, 반도체 매출액 세계 2위, 선박 수주량 세계 2위, 자동차 생산 세계 5위, 주식 거래량 세계 8위, 전자정부지수 세계 1위, 인천공항 기준 공항화물처리 세계 5위, 국제회의 개최 건수 세계 5위, 2010년 뉴스위크 조사 100개국 중 베스트 국가 15위에 교육성취 2위와 경제 역동성 3위, 그리고 경제규모 세계 15위를 자랑한다. 한국은 이제 전세계 비교보다 이른바 선진국 클럽인 오이시디 내의 비교가 더 의미있을 정도로 덩치가 커졌다. 약소국가라는 말을 매일 들어야 했고, ‘메이드 인 코리아’는 저질이라고 생각했던 세대에게 천지개벽 비슷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또다른 얼굴을 보자. 국회의원과 장차관 수로 계산한 여성의 정치권력공유 세계 86위, 여성의 경제참여도와 기회 세계 118위, 여성보건 세계 75위, 국민건강 세계 23위, 삶의 질 세계 29위가 한국이다. 또한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문항에 오이시디 평균이 90%인데 한국은 77%에 그친다. 외형과 내실 간의 격차가 대단히 크다.
전세계 국가들을 동일한 경제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을 목표로 한 국민계정체계(SNA)는 유엔에서 개발되어 1953년부터 발표되기 시작했다. 옛 식민지역이 대거 신생 주권국가로 독립하는 와중에 유엔 가입국 수를 늘리기 위한 조처였던 측면이 있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하여 온갖 비교 지표들이 개발되었다. 이 영향을 받아 인권운동에서도 국제 비교를 위한 지표들을 만들어냈다. 프리덤하우스는 정치적 권리(자유선거, 정치적 다원주의, 정부의 기능)와 시민적 자유(의사표현과 신앙의 자유, 결사의 자유, 법의 지배, 개인 권리)를 합산해 국가의 자유도를 평가한다. 2012년 현재 세계의 46%에 해당하는 90개국이 자유국으로 분류되는데 한국도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같은 단체에서 집계한 세계언론자유지수를 보면 한국은 인터넷 부분적 자유국, 언론 부분적 자유국으로, 세계 196개국 중 64위에 그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가 내놓는 정치불안정지수로는 세계 165개국 중 49번째로 안정된 나라이고,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지수로는 174개국 중 45위다. 사회갈등, 정치불안, 정치폭력, 흉악범죄, 살인율, 교도소 재소자, 군대 규모, 무기 수입 등으로 계산한 세계평화지수로는 162개국 중 47위 수준이다. 요약하자면 한국은 외형적 경제수준에 비해 삶의 질과 인권이 턱없이 부족한 나라다.
물론 양적인 지표로만 인간 삶을 비교하기란 어렵다. 수치로 묘사하는 사회상은 그것 자체가 인위적 구성물이어서 그런 지표가 개선된다고 해서 사회문제가 진정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인간 심리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은 스웨덴을 따르고 싶어하는데 스웨덴의 사민당 대표는 한국의 교육을 부러워한다. 한국이 배우려 하는 독일에서는 스웨덴 복지를 선망한다. 스노든이 제공한 도청 정보를 폭로한 영국 <가디언>의 편집장은 미국의 언론자유를 부러워한다. 또한 본질적 차원에서 인간의 고통은 서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점 역시 기억해야 한다. 사회의 물질적 수준이 평균적으로 올라가더라도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하는 한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적 고통은 훨씬 커진다. 따라서 객관적인 수치로 드러나는 큰 윤곽 못지않게 세부묘사도 중요하다. 인권이 ‘모든’ 사람을 옹호하는 사상으로 남아 있는 한, 큰 틀에서 잡히지 않는 ‘작은’ 사람들의 실상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권을 계량적 순위로 표시하지 않는 인권단체들이 많다. 휴먼라이츠워치나 국제앰네스티가 대표적이다. 이들 엔지오는 완벽한 인권존중 사회란 이 세상에 없다는 전제 아래 각국의 고유한 문제와 결함을 찾아내 비판한다. 그렇게 해야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잊혀진 ‘작은’ 사람들의 고통을 드러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른바 모범적인 선진국들도 예외가 아니다. 국제앰네스티 2013년 연례보고서를 보면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덴마크 같은 나라에서조차 이주자, 난민, 망명자, 여성에 대한 폭력, 국가인권기구의 약화 등이 주요 인권문제로 지적된다. 한국 항목에서는 의사표현의 자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집회의 자유, 노동문제와 노동자 권리, 이주자, 사형제도 등을 중요한 인권문제로 다루고 있다. 근대 초기부터 확립되어온 고전적 인권 목록이 많다는 점에서 우리 인권이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널리 알려진 각종 인권문제를 생각하면 더욱 기가 막힌다. 고객에게 억지미소를 지으라고 강요하여 직원을 정신이상으로 몰아가는 감정노동, 보조출연자들을 짐승처럼 부리고 성폭력에다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방송계의 야만적 관행, 21세기 세계 최고 스마트폰을 생산하는 대기업의 협력업체 서비스 노동자가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할 정도의 19세기적 현실을 보라. 요컨대 한국은 경제로는 ‘수’를 받으면서도 삶의 질이나 인권 현실은 우-미-양 사이를 헤매고 있는 모순적인 사회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문제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경제 논리가 더욱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인권 논리를 억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나라가 정말 가난해서 여력이 전혀 없는 상황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악의적인 모독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이명박 정부 이래 일관되게 나타났고 새 정부 들어서도 호전될 기미가 없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가 보여주듯 반공 매카시즘이 오히려 불사조처럼 부활하는 징조마저 보인다.
필자는 한국의 인권이 국제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곤 한다. 모든 나라 사람들이 자국의 산에 오른다고 치자. 높이 오를수록 공기가 맑아지고 산길이 더욱 평탄해진 나라들이 꽤 있었다. 산 정상 가까이에 스카이웨이를 닦은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에 높이 오를수록 그렇게 될 것이라 믿고 지난 반세기 동안 악착같이 노력해서 이제 거의 8부 능선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공기의 질은 기대했던 것만큼 좋아지지 않았고, 산길도 그리 평탄해지지 않았다. 산길 중간중간에 깊은 웅덩이까지 패어 있어 빠져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문제가 많다. 게다가 이 산 아래로 지진대가 통과하고 있어 산 전체가 요동을 칠 가능성이 높다. 이게 우리 인권의 현실이다. 여기서 등산은 발전을 상징한다. 높이 오르는 것은 경제성장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공기는 삶의 질이다. 산길은 인권상황이다. 지진대는 분단과 반공주의를 가리킨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큰 그림으로 봤을 때 먹고사는 문제와 물질적 축적에서 굉장한 발전을 이뤘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과거에 비해 공권력에 의한 노골적인 인권침해가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수준에 비해 삶의 질은 충격적일 정도로 열악한 상태다. 인간존중 가치는 실종되었고 실질적 인권은 부분적으로만 보장되며 그나마 우려스러울 정도로 뒷걸음치고 있다. 더욱이 분단으로 인한 인권의 환경적 제약은 변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눈부신 경제발전, 약간의 제도 개선, 팍팍한 생활상, 부분적 자유, 인권의 후퇴, 구조적 취약성, 이들의 기이하고 불안정한 조합이 우리 인권의 객관적인 모습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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