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돈균] 벽-응답하라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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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1-06 13:04 조회19,45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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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건물이 서기 위한 구조적 뼈대이며, 건물 외관이 드러나는 피부다. 세상의 모든 건물들은 흙이나 벽돌이나 나무나 쇠나 콘크리트 등으로 다양한 벽을 쌓는다.
벽은 건물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면이며, 외부 침입을 막는 방어막이다. 견고함은 그래서 벽의 본질이 된다. 견고한 벽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 더 분명한 경계표지로서 `담벽`이 올라간다. 옛날에는 외적의 방비를 목적으로 마을 주위에 높고 단단한 벽을 쌓곤 했는데, 벽에 의해 건물의 본질이 거꾸로 결정되는 이런 경우를 `성(城)`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도시에서 벽은 안팎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도시주택의 빈틈없는 콘크리트 벽이 이웃 없는 고독한 도시인을 만들기도 하며, 재개발지구 아파트들의 성곽 같은 외벽은 그 지역의 오랜 거주민들을 `원주민`으로 전락시키는 효과를 만들기도 한다. 관공서의 권위적인 형태의 외벽이 시민과 공무원을 `자연스럽게` 분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벽은 공동체 내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가 쌓은 것일지도 모른다. 전설적인 록그룹 핑크 플로이드는 우리 자신이 상상력 없는 사회의 한 벽돌이 아니냐고 노래하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완강하고 일관되게 무표정한 벽에 어떤 `표정`이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것이 `벽`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을씨년스러운 연말, 한 대학의 벽에 `다들 안녕들 하십니까` 안부를 묻는 새로운 표정의 벽이 나타났다. 글자로 자기 진심을 새긴 `하얀 벽`이 인사의 표정을 드러내자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는 김수영의 `절벽`처럼(`폭포`) 인사들이 응답하고 있다.
벽을 따라 줄지어 붙은 인사들은 세상의 무채색 벽들을 인사하는 벽으로 바꾸고 있다. 공동체의 안녕을 묻는 이 새로운 벽들은 우리가 지금 완고한 `벽`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이제는 이 벽을 새 삶의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깃발처럼 펄럭이는 벽, 움직이는 벽, 응답을 부르는 벽이다. 이 벽의 표정에서 다른 내일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본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매일경제, 2013.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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