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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우기청호(雨奇晴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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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2-03 17:06 조회20,1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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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엔 나이 든 사람도 어려진다.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도 ‘설날 아침에 거울을 보며’라는 시에서, 거울 속 모습은 해마다 달라졌지만 어릴 적 마음은 그대로라고 읊었다. 나이 든 사람도 설이 되면 즐거워 수염이 희끗거리는데도 천진한 동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명절인 설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요즘의 우리 사회를 보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최근에 일어난 카드사 정보 대량 유출 사건만 해도 그렇다. 나 역시 카드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본 결과 집이나 직장 주소, 집전화·휴대전화번호에서부터 카드번호와 카드이용실적금액, 카드신용한도 등에 이르기까지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을 확인했다.


무엇보다 은행이나 카드 회사에 나에 대한 개인 신상이 이렇게 간단하고 일목요연하게 관리되고 있으면서 그러한 것이 이다지도 쉽사리 노출될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또 내 삶의 반경거리에서부터 신용 등급까지 자본에 의해 내가 검증되고 관리되고 있다는 것에 뭔가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이 들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겉으로는 개인의 사생활이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는 것 같지만 현대 사회가 자본에 의해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임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돈이 곧 모든 사람들을 줄 세우는 사회, 그것은 돈이라는 기준으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또 하나의 전체주의라는 생각이 들어 새삼 무섭고 두려웠다. 그러니 ‘문제는 돈이다’라는 자괴감을 곱씹은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소냐 나자리오가 쓴 논픽션 ‘엔리케의 여정’을 보면 돈 때문에 헤어졌다가 만났지만 엄마와 아들이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나온다. 17세 온두라스 소년 엔리케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사는 엄마를 찾아 2574㎞에 이르는 여정에 오른다. 그것도 멕시코를 가로지르는 화물 열차의 지붕에 올라야 하는 죽음의 열차 여행이다. 이 책에 따르면 중남미와 멕시코에서 매년 4만8000여명의 아이들이 미국으로 밀입국을 하는데 이 중 4분의 3은 미국에 간 엄마를 찾기 위해 오는 아이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 헤어져 살았던 엄마와 아들은 서로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떠났고, 천신만고 끝에 다시 자식과 재회했으나 가족을 잃고 마는 역설이 이 불법이민자 가족의 초상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 역시 돈 때문에 부모와 자식 간의 천륜이 무너지는 현상이 자주 벌어진다. 하지만 나는 다가오는 설날에는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가족들이 모여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설이 되어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돈 때문에 근심 걱정이 늘어나지만, 연암 박지원처럼 마음이 어려지는 것은 가족과 함께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설날에는 고향에서 가족만 보는 게 아니라 그동안 못 보던 친구와도 만나는 날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행복인 날이다. 행복은 사회 생활을 통해 얻어지는 돈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가족과 타인을 통해 자신에게로 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 민족은 ‘정’을 통해 보여주었다. 옛말에 우기청호(雨奇晴好)라는 말이 있다.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와서 별맛이고, 맑은 날은 맑아서 좋다는 뜻이다. 이번 설날에 가족들이 모여 너무 큰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가족들과 묵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마음을 ‘우기청호’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고향은 삶의 뿌리이다. 다가오는 설날에는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면 연암 박지원처럼 나이를 한 살 더 먹어 몸은 늙어도 인간의 본성에 있는 정은 늙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박형준 시인
(한국경제, 2014.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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