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선우휘, 그리고 조선일보의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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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9-23 14:12 조회21,3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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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년 시절 내가 좋아한 작가의 한 사람은 선우휘였다. 그의 출세작이자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불꽃>(1957)에 감동하여 나는 그의 작품을 빠짐없이 찾아 읽는 애독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문학에 들어 있는 것이 이상주의나 휴머니즘 같은 요소만이 아님을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학평론가가 되고 나서 내가 선우휘 소설의 긍정적 측면들 속에 뒤섞여 존재하는 그의 이념적 공격성의 배경을 검토하는 졸문 <선우휘론>(1967)을 쓴 것은 나에게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선우휘는 ‘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의 한 명이지만, 언론인으로서도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그는 조선일보사에 재직하는 25년 동안 논설위원·편집국장·주필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면서 오늘의 <조선일보>를 만드는 데 기여한 ‘공로자’였다. 그런데 그는 작가로서 그렇듯이 언론인으로서도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리영희를 비롯한 비판적 성향의 기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들과 대립적 입장에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강연과 논설을 통해 거침없이 반공주의를 설파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 체제를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름대로 언론인의 정도를 지켰고 때로는 권력에 맞설 줄 알았다. 그와 각별히 친했던 고향 후배 지명관 교수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2008)에서 전하는 일화를 살펴보자.
너무도 유명한 사건이지만, 1973년 8월8일 일본에 머물던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도쿄에서 납치되는 일이 벌어졌다. 다음날 신문들은 “김씨가 8일 오후 1시 조금 지나 한국말을 쓰는 5명의 청년들에 의해 호텔에서 사라졌으며” 현재 조사 중이라고 보도했다. 8월10일치 <동아일보>는 “호텔방에서 북한 담배꽁초 2개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은연중 혐의를 북한에 두는 암시를 내보냈다. 그러나 며칠 뒤 김대중은 심하게 다친 모습으로 자기 집 앞에서 발견되었고, 범인들은 자칭 ‘구국대원’이라고 보도되었다. 이럴 때면 으레 그렇게 하듯 한국 정부는 납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건은 정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8월22일 한국의 중앙정보부 기관원이 납치 사건에 관련되어 있음을 한국 정부 관계자가 인정했다는 내용이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보도되었고, 이 때문에 그 신문 지국이 폐쇄되고 특파원 3명이 추방명령을 받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더구나 9월5일에는 재일공관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지문이 호텔에서 채취한 것과 일치한다는 일본 경찰의 발표까지 나왔다. 물론 한국 신문에는 이런 사실들이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이때 한국 언론이 그래도 다 죽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은 선우휘였다. 후일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그날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9월7일 새벽, 편집국에 선우휘 주필이 나타났다. ‘주필로서의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 어떤 위협에도 누구의 간섭에도 굽히지 않겠다.’ 비장한 어조로 야근자들에게 거사 계획을 알린 주필은 윤전기를 세우고 자신이 쓴 사설을 끼워놓을 것을 지시했다.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라는 제목의 사설이 지면에 옮겨지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신문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고, 심지어 <동아일보>는 9월22일치 사설에서 한국 기관원 관련설을 떠들어대는 일본 정치인과 언론에 강하게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꼭 40년이 지난 오늘 현실은 변한 것과 변치 않은 것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혼란에 빠뜨린다. 언뜻 보면 몇몇 신문의 제호만 그대로 남아 있고 세상은 온통 변한 듯하다. 중앙정보부는 국가정보원으로 점잖게 이름이 바뀌었고, 하는 일도 ‘구국대원’의 이름으로 후보를 납치하는 것과 같은 거친 폭력이 아니라 몰래 인터넷 댓글을 다는 정도의 부드러운 ‘심리전’으로 유연화되었다. 그러나 다시 보면 본질적으로 똑같은 성능을 가진 낡은 공작정치가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 선우휘 같은 언론 협객 대신 간교한 권력 게임 기술자가 데스크에 앉아 있는 <조선일보> 정도가 달라졌다면 달라졌다고 할까.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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