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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알고 보니 사람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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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9-23 17:03 조회20,9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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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온 뒤 귀국을 미루고 해외에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을 내놓은 지도 어느새 20년이 훌쩍 지났다. 가보니 거기도 사람이 살고 있더라는 책 제목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어찌 보면 북한 사람들은 모두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투사요 영웅이라는 말보다 더 불온하기도 했다. 투사나 영웅이야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이지만, 이건 같은 사람이라지 않는가. 결국은 북녘도 마찬가지로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생각은 당시만 해도 많은 이들에게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그러니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더라는 저 제목은 결국 북한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앞서, 북한을 극도로 타자화해 온 남한 사회를 설명해주는 것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보면 “알고 보니 사람이고 거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더라는 말은 아주 조심해야 할 말이다. 냉전 시대의 남북한 사이에서야 또 그렇다고 쳐도 같은 사회에서 얼굴 맞대고 살아가는 구성원들끼리 “알고 봤더니 사람”이더라고 한다면 얼마나 황당한가. 그런데 설마 그러랴 싶을지 몰라도 이런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알고 보니 특정 지역 사람들이라고 모두 보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거나, 문제 학생이라고 날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둥, 또 이러저러한 집단의 사람들에게도 자기 생각이 있고 능동성이라는 것이 있더라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럼 당연하지, 사람인데 자기의 욕망은 전혀 없이 선량하거나 악하기만 하고, 또 피해자이거나 가해자이기만 한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이야기들은 북한에 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에 대해 낮추어 보는 기존의 사회통념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린애에게도 생각이 있으며, 결혼이주여성도 능동적인 행위를 하고, 장애인이라고 다 무능한 것은 아니라는 식의 말은 그저 출발점에 불과하다. 약자를 옹호하고 배려하자는 논의를 하면서 그들도 인간이더라는 식에서 그치면 곤란하지 않는가. 애초에 문제는 마음대로 그어 놓은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중심과 주변의 선, 그리고 그에 따른 선입견과 차별적 발상들이니 말이다.


그런데 요즘 보니 알고 보면 그들도 사람이라는 정도는 문제도 아닌 듯하다. 설마 그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했던 논자들의 머릿속에 어떤 사람들의 자리는 없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정적을 비난하고자 장애인이나 여성에 비유할 때, 또 사회적인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장애를 그저 수사로 사용할 때, 심지어는 개발에 반대하는 수사학으로 “고작 돈 몇 푼으로 살 수 있는 매춘부”와 “도도한 여신”이라는 진부한 여성 이분법이 동원될 때, 과연 여성과 장애인은 그저 글에 써먹기 좋은 표현이 아니라고 새삼 항변해야 하는 것인지 암담하다. 이 언사들의 장애인 비하나 여성 혐오의 표현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장애인을 칭송하고 여성을 찬양한다고 해서 해결 날 문제는 아니다. 같이 삶을 살아가고 논의하며, 그래서 함께 정치를 해나가는 같은 공화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비하나 찬양이나 나와 마찬가지의 사람으로 보지 않기는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사실 추상적인 차원에서 만인의 평등과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어쨌거나 대놓고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각기 다른 입장의 사람들이 부대끼고 살아가는 세상으로 그 좋은 말들이 들어오는 순간, 말은 시험대에 오른다. 내 생각 속의 사람은 어떤 성별이며 어떤 행색을 하고 있는가,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으로 나는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백영경 방송통신대 교수·문화인류학
(한겨레, 2013.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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