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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21세기 새로운 가치관을 찾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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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1-08 16:41 조회21,0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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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깐수 사건에 대해 풀지 못하는 의문은 북한 당국이 왜 정수일을 공작원으로 남파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 후의 경과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성실함과 끈기에다 10여개 외국어에 능통한, 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을 고루 갖춘 드문 인재이다.

그러나 그런만큼 그는 세상물정에는 좀 어두운 사람이고 간첩으로서는 말하자면 실격이었다. 물론 그가 남다른 민족감정의 소유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는 조선족 출신 중국인으로서의 보장된 미래를 마다하고 조선국적을 선택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이 뛰어난 학문적 재능의 소유자에게 얼토당토않은 공작원의 소임을 맡겨 죽음의 땅으로 내몰다니! 어떤 미사여구를 가지고서도 국가권력의 이 무참한 횡포를 변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깐수 사건의 전 과정에 걸쳐 관세음보살 같은 존재가 배후에 숨어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바로 정수일 박사의 부인이다. 소설가 황석영 씨의 증언에 의하면 감옥에 와서 정 박사는 자기 아내에게까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을 못내 미안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분명한 것은 그의 부인에게 있어 정수일이라는 사람은 공작원이든 아니든, 또 한국인이든 아랍인이든, 나아가 국적이 무엇이든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정수일의 신분이 어떻게 규정되었건, 심지어 북한에서 파견한 간첩이라고 떠들썩하게 발표된 다음에조차도 그녀는 그 모든 것에 구애받지 않고 변함없는 애정과 신뢰를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힘든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남편이 부탁하는 책과 자료를 구하여 감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정수일 박사는 이 옥바라지에 힘을 얻어 놀라운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그의 부인이 국적과 사상과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그의 남편 정수일에게서 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민족이니 조국이니 하는 20세기적 화두보다도 정 박사 부인이 발휘한 것과 같은 더 부드럽고 더 근원적인 힘이 우리를 이끌고 가도록 21세기의 역사는 바뀌어야 한다.
― 「깐수와 그의 시대」 중에서


정수일이란 분은 1934년 중국 연변에서 태어나 베이징대학을 졸업하고 중국 외교부의 유능한 젊은 외교관으로 출세가 보장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화려한 길을 버리고 그가 그때 조국이라 생각했던 북한으로 들어와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북한 당국은 그를 학자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공작원으로 선발하여 필리핀 국적을 지닌 아랍인 2세로 위장시켜 남한으로 파견했습니다.


한국으로 들어온 그는 능숙한 아랍어 실력과 동서문명 교류에 관한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아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1992년에 출간된 <신라-서역 교류사>라는 책은 그해 학계의 주목받는 화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서투른 간첩활동이 들통나 체포됩니다. 간첩 '깐수 사건'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재판 끝에 그는 그런 사건으로서는 예외적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5년 만에 출감했습니다.


남한에 와서 결혼한 그의 아내는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출옥한 이듬해부터 그는 많은 연구업적을 발표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수많은 역경을 바른 정신으로 이겨낸 한 인간승리의 기록을 봅니다.


동시에 나는 그의 부인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깐수와 그의 시대>라는 글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정수일 박사의 부인을 통해 실현된 한없이 포용적인 인간적 사랑입니다. 사상도 이념도 또 국적도 넘어선 그 헌신의 자세야말로 우리가 믿고 기댈 희망의 등불이라고 생각합니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노컷뉴스, 2013.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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