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돈균] 장갑 - 손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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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2-02 12:57 조회19,12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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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북풍한설이 몰아친다. 서랍을 여니 지난겨울에 꼈던 가죽장갑, 다섯손가락 모양이 뚜렷한 모장갑, 귀여운 벙어리장갑이 차곡차곡 놓여 있다. 요즘에는 이런 장갑 외에도 스마트폰 화면 터치가 가능한 장갑까지 나왔다. 여자들은 가죽장갑이라 해도 팔목을 지나는 토시 같은 긴 장갑을 쓰기도 한다. 장갑은 단지 보온 기능이 아니라 `패션`의 문제이기도 하다. 장갑은 이 점에서 자연 상태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던 `손의 표정`이 드러나는 사물이기도 하다.
다소 차가운 느낌이 드는 얇은 표피의 가죽장갑을 끼고 나갈 때, 내 손의 표정은 정제되고 반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가죽장갑에는 늘 약간의 긴장이 스며 있다. 가죽장갑은 정장 스타일에 잘 어울린다. 이때 전형적인 손의 표정은 `악수`하는 손이다. 손은 정돈된 규율, 사회적 약속 안에서 사는 `어른 표정`을 하고 있다.
다섯손가락 모장갑은 이에 비해 자유로운 손의 표정을 드러낸다. 같은 다섯손가락 모양이 장갑에 나타나지만, 손가락모장갑은 가죽장갑에 비해 훨씬 더 긴장이 완화된 손의 표정이다. 모가 지닌 촉감의 무의식이기도 하고, 손가락 움직임에도 율동성이 부여된다. 손가락모장갑은 `소년의 장갑`이거나 `청년의 장갑`이다.
그렇다면 벙어리장갑은? 요건 여지없이 `개구쟁이 장갑`이다. 벙어리장갑은 대개 어릴 때 엄마가 사준 `최초의 장갑`일 것이다. 벙어리장갑에서 드러나는 손의 표정은 다섯손가락의 `기능적 분화`가 일어나기 전 손의 원형과 관련된다. 어린이 눈장난, 순수한 놀이처럼 이루어지는 예술적 창조의 순간, 사랑에 몰입한 연인은 여러 `기능(필요)`에 대한 고려 없이 `맹목적인` 표정을 하고 있다.
모든 천진한 놀이는 손이 대상과 `어떻게` 만나느냐에 대한 방법적 고려 `이전`에 일단 `만나는 일` 그 자체를 즐거워한다. 개구쟁이 표정은 `벙어리` 장갑처럼 `언어`(설명)가 필요 없는 천진한 표정을 하고 있다. 어른과 도덕적 의무와 문자적 지식을 경멸하고, 대신 아이와 소녀들 춤과 음악을 사랑했던 니체가 어떤 겨울 장갑을 고를지는 자명하다. 올겨울 당신은 어떤 손의 표정을 갖고 싶은가.
함돈균 문학평론가
(매일경제, 2013.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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