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 모어를 사용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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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0-30 15:38 조회22,28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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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지난주, 다시 공휴일로 지정된 한글날을 보내면서 인간에게 언어와 문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한글은 한국어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된 체계라는 점에서 일종의 맞춤형 문자다. 한국어를 모어로 쓰는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역사적 선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고유의 문자가 없어 로마자와 같은 외래 문자를 수입해 쓰는 나라들과 크게 대비되는 자랑거리다. 한글날을 한글 문자의 창제만으로 기념하는 건 좁은 소견일 것이다. 우리 언어를 함께 쓰는 모든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정체성과 그 의미를 곱씹어 보는 날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언어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 한국인이 이 방면의 인권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지 자신할 수 없다. 언어 인권은 국제적으로 아직 통일된 명칭도 정해지지 않은 새로운 영역의 인권이지만 먹거리 주권과 더불어 국제인권 목록에 등재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군에 속한다.
최근에 보도된 언어 인권유린 사건을 살펴보자. 서울 강남에는 월 등록비가 200만원이 넘는 고액 유아영어학원이 성업중이라 한다. 만 두살 반짜리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유아들을 모아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영어 말하기와 쓰기를 가르치고 수학, 과학, 발레 등 모든 수업을 영어로만 진행한단다. 문제는 이런 교육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소변도 못 보게 하면서 영어 공부를 강요하다 보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아 정신과 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는 아이들도 생기고 있다. 아이들이 얼마나 심한 트라우마를 받았으면 하루에 속옷을 몇장이나 적시며 저 고생을 하고 있을까. 몇해 전에는 영어 발음을 가르친다고 아이의 혀 인대를 자르는 일까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한마디로 교육을 빙자한 극심한 아동 인권침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일 수용시설 같은 데서 이런 일이 발생했더라면 크나큰 이슈가 되었을 터지만, 교육의 이름으로는 그 어떤 짓을 해도 대충 양해가 되고 넘어가는 우리 현실이 과연 정상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언어학에 따르면 아이들에게는 여러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생래적 능력이 있지만, 읽고 쓰는 능력을 제대로 습득하는 데에는 모어가 제일 낫다고 한다. 또한 모든 자연언어들의 표현능력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우월한 언어도 열등한 언어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모어는 모국어와 다르며, 어떤 경우엔 양자가 충돌하기도 한다. 50대 중반이 넘어 한국 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서경식 선생은 모어인 일본어가 아닌 모국어 조선어를 익히기 위한 단계를 설정한 적이 있다. ①장을 보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외출할 수 있다. ②영화나 텔레비전을 보고, 사전 없이 신문을 약 80퍼센트 정도 이해한다. ③지인들과 정치적·문화적 주제로 논의할 수 있고 거의 오해 없이 상대방의 취지를 이해하고 자기 생각을 전할 수 있다. ④원고를 그냥 읽는 형식이 아닌 강연을 1시간 정도 할 수 있다. ⑤경찰 심문에 침착·정확하게 대응하고, 법정에서 반론을 펼칠 수 있다. ⑥사전 없이 소설을 읽는다. ⑦번역자 도움 없이 에세이나 소설을 집필한다. 이것은 원어민들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일 것 같은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모어의 근본적인 친숙함과는 비견될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모어와 모국어가 일치하는 경우, 모어 사용은 인권의 토대인 생명권·자유권·행복추구권과 동일한 차원의 기본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모어 사용권을 왜 최근 들어서야 기본 인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는가. 2차대전 후 국제적으로 규범화된 인권은 크게 보아 개인의 권리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시민정치적 권리나 경제사회적 권리나 그 바탕에는 개인의 청구권 개념이 깔려 있다. 그러다 집단의 권리, 곧 3세대 인권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언어 권리도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언어는 어떤 집단에 귀속된 상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적 차원에서 이주와 다문화적 상황이 빚어지면서 모어를 사용하는 문제가 권력·억압·정체성 등과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별로 문제되지 않던 새로운 인권침해가 생긴 것이다. 급기야 국제 펜클럽의 주도로 1996년 바르셀로나에서 사멸 위기에 놓인 소수언어와 일반적인 모어 사용권을 포함한 세계언어권리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문화와 언어의 다원주의를 일원화하려는 국가들의 경향성, 그리고 “탈규제를 진보와, 경쟁적 개인주의를 자유와 동일시하며, 심각한 경제·사회·문화·언어 불평등을 야기하는 초국적 경제주체들이 제시하는 경제성장 모델”을 언어권리 침해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특히 교육은 언어 공동체 내에서 언어적·문화적 자기표출 역량을 신장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그토록 떠받드는 ‘세계무대’에서는 오히려 고유한 언어권리를 강조하고 있는데 정작 이 땅에선 모어가 아닌 외국어를 가르치려고 아이를 정신병자로 만들고 있으니 이 일을 대체 어찌해야 좋을까.
필자가 아는 한 전세계에서 모어와 관련된 날을 법정 공휴일로 기념하는 나라는 한국과 방글라데시뿐이다. 방글라데시는 아주 특이한 경우다. 1947년 파키스탄이 수립된 후에도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동파키스탄 벵골 지역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에서 쓰는 ‘우르두어 오직 우르두어’만을 파키스탄 전체의 유일한 공식언어로 인정한다는 조처가 발표되었다. 1952년의 일이었다. 동파키스탄에서는 당장 반발이 터져 나왔고 민중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경찰은 포고령 144호를 발표하고 일체의 집회를 금지했지만 2월21일 다카대학과 다카의학교의 학생들이 항의시위를 시작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발포로 대응했고 수십명의 사망자가 나오는 초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이 사건을 통틀어 벵골언어운동이라고 한다. 단순한 언어 운동이 아니라 한 인민 집단 전체의 기본권과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언어 자기결정권 운동이었던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한 파키스탄 정부는 입장을 선회하여 벵골지역에는 벵골어가 공식언어임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벵골언어운동은 더 큰 정치운동과 맞물려 확대되었고 마침내 1971년 동파키스탄 독립전쟁을 통해 방글라데시가 분리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모어 사용을 둘러싼 투쟁이 새로운 국가의 탄생으로까지 연결된 희귀한 사건이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지금도 2월21일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다카의학교 근처에는 샤히드 미나르라는 14미터 높이의 거대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자기 나라의 모어 사용권 투쟁 이야기를 보편적인 인권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주효하여 유네스코는 매년 2월21일을 국제 모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지정했고 2000년부터 해마다 이날을 세계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유네스코의 취지에 공감한 유엔총회는 2008년을 국제 언어의 해로 선포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문자해독, 인간발전, 민주주의를 연결한 개념을 발전시켜 매년 10월9일을 국제 문자의 날로 제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의미의 국위선양은 이런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런 가시적인 움직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모어를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다. 모든 사람이 여러 언어를 자기 뜻대로 취득할 수 있는 다원주의를 지지하면서도, 즉 언어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인간 본연의 가치로서 모어 사용권의 중요성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모어가 아닌 외국어가 우리 위에 지배적 권력으로 군림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경제사회적 불평등, 문화심리적 억압의 원천이 된다면 그것을 심각한 인권침해로 거부할 수 있는 안목과 상상력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영어 광풍은 특히 좋은 예가 된다. 진정한 다문화·다언어로서의 영어는 적극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문화·교육·경제 헤게모니로 작동하는 영어에 대해 그것을 억압권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더욱 열심히 따라잡아야 할 목표로, 자신의 부족함을 책망하는 선망으로 인식할 때 우리의 언어 인권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이 점에 관한 한 지식인과 교육자들의 책임이 무겁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3.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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