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시도: 요양시설과 집의 이분법을 질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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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08-02 12:55 조회2,95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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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타운 ‘입주’와 요양시설 ‘입소’의 차이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제 유교 문화에 토대를 둔 노년 돌봄 규범은 ‘집’에서 가족, 특히 자식에게 받는 돌봄을 가장 바람직하고 또한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한편으로는 인구 변동과 젠더 관점의 확산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터넷 기술의 발전이 초래한 경제적‧사회적 구조의 급격한 변화가 노년들의 돌봄 의식에도 변화를 가져온 건 사실이다.
경제적‧심리적 자립, 그리고 공간적 독립을 원하는 노년의 수는 점점 늘고 있다. ‘사생활’이란 이름으로 자율성이나 자유, 자존감 등도 강조된다. 노년들이 원하는 사생활은 타인의 간섭이나 지배 없이 자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거다.
그러나 99881234, 즉 아흔아홉 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하루나 이틀 혹은 사흘 앓고 4일째에 죽는 ‘복’은 원한다고 주어지지 않는다. 의료기술은 수명만 연장한 게 아니다. 질환을 안고 고통 속에 사는 시간도 늘어났다. 이 시간은 기본적인 일상 유지조차도 누군가의 돌봄에 의존하게 되는 시간이다. 이때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하루 3-4시간의 방문 요양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결국’ 전면적인 돌봄이 필요한 시점이 오게 된다면? ‘결국’ 요양시설에 가야 한다면?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고, 아니 자식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독립적인 삶, 즉 사생활이 보장되는 삶을 주장하던 사람도 이 시점에 이르면 모순에 빠지게 된다. 한국 사회에는 ‘요양시설에 거주하는 노년’을 부정적으로 정체화하는 사회문화적‧심리적 기본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요양시설은 타의에 의해 입소하게 되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고려장’으로 비유되곤 한다. 전문적인 기술을 갖춘 돌봄자가 있기에 더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더 잘 ‘살기’ 위해 거주지를 옮기는 거라는 생각은 적어도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수가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요양시설 관련해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정도의 기대라면 ‘셀프 부양’이라는 말로 홍보되고 있는 ‘실버타운’에 적용되어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고가의 보증금과 월세를 내는 실버타운은 쾌적한 환경에서 독립적인 사생활을 누리고자 입주하는 곳이다. 이곳이 ‘집’이 아닐 이유는 없다. 일상 수행 능력이 있는 사람만 입주할 수 있는 이곳에서 좋은 돌봄을 받으며 살다가, 인지능력이나 신체 능력이 현격히 떨어지면 ‘건물’을 바꿔서 ‘계속’, 그러나 이번에는 그 신체적‧정신적 능력의 변화에 맞는 돌봄을 받으며 머물 수 있다.
반면 노인요양시설은 ‘더이상 ~~이 불가능해져서 결국 입소’하게 되는 곳이다. 타의에 의해 입소하게 되는 이곳은 결코 ‘집’이 될 수 없다. 집을 떠나 ‘죽을 때까지 그저 잔여적으로 생명을 연장할 뿐인 곳’으로의 이동은 노년들에게는 어떤 원초적인 슬픔을, 그리고 그들을 대리해 결정을 내린 ‘보호자들’에게는 직면하고 싶지 않은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남긴다.
노인요양시설을 삶이 멈추는 게 아니라, 다른 형식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만드는 건 전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시설’이라서 문제인가? 실버타운 역시 일종의 시설 아닌가. 만약 집에 계속 머물더라도 누워만 있어야 하는 상태에서 전적으로 타인의 돌봄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산다면, 그 일상에서 우리가 확정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생활의 내용은 무엇인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사생활을 추구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지만, 동시에 자기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전통적 규범 또한 엄연한 현실에서, 요양시설에서의 삶은 가족이 둘러앉아 논의할 수 있는 의제도, 노년이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현실도 될 수 없다.
그러나 돌봄의 탈가족화가 시장에서는 용인되는데(실버타운 입주), 공공에서는 용인되지 않는(요양시설 입소) 이 모순에는 국가의 책임이 크다. 명목상으로는 돌봄의 공공화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시장화를 추구하면서 국가는 노년과 ‘보호자’, 그리고 돌봄노동자를 의식의 분열로 내몬다.
노인요양시설과 사생활
“독방이면 좋겠지만, 하다못해 칸막이라도…”
그는 대학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의 도입과 함께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다. 재가방문 돌봄을 주로 하면서 노동조합도 만들었고(민주노총 공공운수노동조합 의료연대본부 재가요양지부) 요양보호사 협회도 만들었다. 간병을 포함한 돌봄노동의 경험을 살려 돌봄 종사자가 되려는 사람들 교육했고, 사회서비스원의 준비기구였던 ‘좋은 돌봄 실천단’의 핵심 구성원이기도 했다.
요양보호사 일을 그만둔다고 할 즈음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더 늙어서 일상 유지가 힘들면 어디서 누구한테 돌봄 받으시겠어요?” 오랜 시간 현장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한 사람으로서 그의 답변은 빠르고 분명했다.
“나는 요양원에 들어갈 겁니다.”
“자식이 없으세요?”
“아들이 한 명 있지만 절대 아들에게 돌봐달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
“내가 해봐서 압니다. 이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아들한테 맡길 순 없어요. 마음이 있어도 못 할 거예요.”
“요양원에 가실 수 있겠어요?”
“돈이 없으니 가야죠. 돌봄은 전문가가 잘합니다. 전문가한테 받는 게 맘도 편해요. 그런데, 단 하나만 보장되면 좋겠어요.”
“그게 뭔데요?”
“사생활이요. 독방이면 제일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하다못해 칸막이해서라도 사적 공간이 보장되면 좋겠어요.”
그가 돌봄노동 현장에 몸담고 있을 때, 돌봄 종사자로, 조합지부장으로, 현장 교육가로 ‘좋은 돌봄’을 구상하고 실천하고 투쟁한 그 모든 과정은 어쩌면 이 하나의 목표를 향한 건 아니었을까? 자원이 넉넉지 않은 돌봄 의존자라서 고가의 실버타운이 아닌 요양원에 입주할 때, 최소한 칸막이로라도 사생활을 보장받으면서 훈련된 돌봄 종사자의 서비스를 받는 것 말이다.
요양원에 ‘입소’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그에게 없었다. 직업인인 요양보호사가 가족보다 더 나은 돌봄을 제공하리라는 걸, 그리고 좋은 돌봄, 나쁜 돌봄이 개별 요양보호사의 인성이 아니라 노동환경 등 구조에 달린 것임을 그는 잘 ‘안다’. 이 지식을 기반으로, 돌봄 서비스 제공자와 자신이 원하는 돌봄을 두고 대화를 나누거나 협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지장애가 와도 천천히 진행될 테니 적응할 시간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잘 아는 그 현장에서 가장 부족한 것, 가장 지켜지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그는 안다. 바로 ‘사생활’이다.
독일 노년 요양원들의 구호 ‘사생활을 보장합니다’
각자가, 시기마다, 소망하는 사생활의 내용
많은 사람이 요양원 입주를 가장 망설이는 요인으로 ‘사생활 없음’을 꼽는다. 자기만의 방, 또는 1인실. 타인의 시선 없이 고유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 적어도 나의 내밀한 모습을 누군가 보지 않을 수 있는, 나 또한 타인의 내밀한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 공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기저귀 케어할 때 요양보호사 외에는 아무도 그 장면을, 곁눈으로 살짝이라도 볼 수 없는 공간이다.
내가 한동안 방문하곤 했던 요양시설은 3인실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저귀 케어가 있을 때면 나는 사용되는 칸막이의 폭이 내밀함을 온전히 가리기에는 좁다고 생각했고, 내가 침대 위의 당사자인 듯 불안했다. 화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손님이 왔을 때, 입주 노년과 손님이 주고받는 몸짓과 표정, 말 등도 오롯하게 그들만의 관계로 지켜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양원에서의 사생활 보장은 대략 이런 것과 연관되리라.
위에서 소개한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해서 그가 말하는 사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요양원에서 지내는 노년의 나이나 건강 상태 등의 차이와 그에 따른 돌봄과 생활의 차이에 주목하게 되면서, 나는 요양원에서 보장되면 좋겠다고 각자가 소망하는 사생활의 내용을 좀 더 명료하게 질문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예를 들어 타인의 시선이 없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어떤 상태로 ‘있고’ 싶은 건지. 이 질문은 또한 타인의 부분적인 돌봄에 기대어 어느 정도 스스로 일상을 수행하는 상태나 (중증질환이나 심한 인지장애 등으로) 전면적인 돌봄에 의존해야 하는 상태 모두에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 건지. 사생활 보장, 또는 사생활 침해 방지라는 말은, 무엇의 방지, 혹은 무엇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하는 것일까.
사생활에 대한 강조는 요양시설과 집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핵심 메커니즘과도 관련된다. 어느 나라건, 개인주의가 더욱 발달한 나라에서는 더더욱, 노년 요양원에서는 ‘사생활을 지켜드립니다’라는 약속이 ‘집처럼’이라는 (거의 강령이 되다시피 한) 구호와 쌍을 이룬다. 독일의 경우는 어떤가 궁금해서 무작위로 여러 노인요양원 홈페이지를 찾아보았다. 사생활 보호 강조와 ‘집’으로서의 거주지, 좋은 돌봄, 다양한 프로그램을 활용한 공동생활, 그리고 인지장애가 심한 노년에 대한 전문가의 특별 돌봄 등이 대략 일관되게 소개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1인실이나 2인실 중 선택할 수 있으며, 익숙한 가구나 사진, 그림, 기념품 등으로 방을 꾸미는 것도, 원하면 작은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것도 가능하다. 방문을 잠글 수 있으며, 요양보호사나 다른 직원이 방에 들어가려면 꼭 노크하고 허락받는다. 공동생활공간에 머물든, 자기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 등등.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늘 보던 그대로다. 작은 반려동물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게 새롭다면 새로울까.
사생활 보장으로 기껏해야 기저귀 케어 같은 내밀한 일이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지 않는 것 정도를 떠올린 내가 창피했다. 그런데, 저런 형태의 사생활 보장이 왜 한국의 요양시설에서는 안 되는 것일까. 전혀 안 되고 있나?
소규모 너싱홈을 통해 다시 생각해보는 사생활
얼마 전, 사람중심케어실천네트워크의 현장견학팀을 따라 ‘함춘 너싱홈’을 방문했다. 대단히 좋은 돌봄이 이뤄지고 있다고 꽤 알려진 곳이다. 현재 19명의 초고령자가 거주하며 돌봄을 받는 이곳은 일단 물리적 공간으로 볼 때 상당히 ‘집’에 가깝다. 3층짜리 작은 건물의 1, 2층이 너싱홈으로 운영되고, 3층에는 원장과 그의 가족이 산다(원장의 남편 역시 은퇴 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고령자들에게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즉각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 입주 고령자들의 평균연령은 대략 90세에 달한다. 2인이 방 하나를 공유하고 식사와 색칠하기, 체조 등 프로그램은 공유공간인 거실에서 함께 한다. 침대 옆에는 각각 이동식 화장실과 자그마한 개인 장이 놓여있고, 벽에는 사적 역사를 가리키는 기념사진과 가족사진이 붙어있다.
“침대는 잠자고 안정을 취하는 곳이지, 하루 종일 있는 곳이 아닙니다. 밥을 먹고 TV를 보는 등 침대에서 모든 걸 한다면 그건 병원이지, 일상의 공간이 아닌 거죠.”
이 말과 함께 원장은 어르신에게 반복해서 훈련한다는 동작을 시범으로 보여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몸을 돌려 침대 모서리에 잘 앉는다, 그다음 조심스레 허리를 들어 두 발로 바닥에 안전하게 내려선다.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몸을 싣더라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과정을 스스로 하(려고 애쓰)는 건 매우 중요하다. 인지장애나 만성질환이 있어도 일상기능 회복을 목표로 삼는 이 너싱홈에서 고령자들은 콧줄도, 침대에 누워서 지내는 것도, 소변줄도 없이 ‘일상의 삶’을 살다가 그야말로 ‘노쇠’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고 그가 말한다). 그의 대학병원 간호사 경험과 지식도 여기에 이바지하는 몫이 크다.
휠체어에 앉아 음악에 맞춰 체조하는 입주자 노년들과 함께 체조한 다음,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요양원 가기가 꺼려진다는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게 사생활 보호 내지는 1인실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 사람이 같이 있으면 갈등과 싸움이 생겨요. 그런데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서로 마주 봅니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말도 없고 표정도 없지만, 곧 서로 챙기고 돌보는 사이가 되죠. 그리고 1인실에 혼자 있으면 외로워하세요. 방문 열어놓고 바깥쪽만 바라봅니다.”
그의 답변에 이어, 노인복지학 연구자였던 다른 사람이 옆에서 의견을 보탰다.
“사생활이니 1인실이니 하는 건, 우리나라가 못 살았을 때, 여러 사람이 한방에서 복작대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생긴 말인 거 같아요. 나이 들어 몸도 불편하고 맘대로 바깥 출입도 못하면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게 좋죠.”
사생활 개념을 협상하기
함춘 너싱홈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살고 있는’ 노년들의 평균 나이는 89.7세다. 최종녀 원장은 (특히 요양시설에서의) 노년 돌봄은 85세 이전과 그 이후 분들의 경우 달라야 하며, 어느 정도라도 사람중심케어가 가능하려면 30명 이하 규모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요양시설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 곳, 치아가 한 개도 없는 분에게도 절대 음식을 섞어 갈아 드리는 일이 없으며, 오히려 맛있는 등심갈비고기를 잇몸으로 드실 수 있게 조리해 생신상에 올리는 곳. 휠체어에 의존하지만, 콧줄도 소변줄도 없이 침대를 벗어나 거실에 모여 무언가를 하거나, 그냥 있거나 할 수 있는 곳. 2명이 ‘짝’이 되어 방을 공유하는 곳.
잠깐의 방문이었지만 이곳에서 사는 노년분들을 보는 게 참 좋았다. 동료 시민으로 안심이 되었다고나 할까. 요양시설이 실제로 ‘공동생활 홈’의 형태를 띨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다고나 할까.
물론 함춘 너싱홈 같은 요양시설은 지속가능성도, 재생산 가능성도 없음을 알고 있다. 특별한 한 사람의 열정과 역량에다가, 여러 돌봄노동자들의 엄청난 ‘헌신’과 노동이 보태져 만들어진 이런 오아시스 같은 ‘홈’은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사건 같은 것이다. 때문에 감탄과 감동의 대상이지만, 그만큼 절망과 한숨을 낳는다.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 좋은 돌봄이 가능한지, 요양시설이 집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소중하고 놀라운 사건이다.
집과 요양시설, 반대 개념이 아니라
요양시설이 새로운 형태의 거주지가 될 가능성은?
사생활도 계속 새롭게 협상되고, 재발명되어야 하는 개념 아닐까. 사생활이 서구에서 17세기 말에 시작되어 18세기에 적극적으로 고안․전개된 개념이라는 사실, 특히 중산층 계급의 정체성 구축을 위한 자기 이해의 핵심이었음을 환기하고 싶다.
(주거지역과 교외지역의 확장 등) 근대 도시의 출현, 사적 경험에 관한 관심, 그리고 (개인주의, 가정, 인생과 도덕에 대해 개인적 해석을 할 수 있는 권리의 강조 등) 중산층 의식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시기에 개인의 사적 체험과 사회적 요구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소설 또한 탄생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내밀한 시선으로 성찰하고, 자기만의 고유한 의미를 실험하는 공간으로서 사생활은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개인의 권리다.
그러나 이 개인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지닌 생산적 인간을 지칭한다면, 늙고 병들어 돌봄 의존도가 높아지는 노년의 사생활은 어떤 형태여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독립이나 자율을 ‘잘 의존하는 (가능성의) 상태’로 재정의하고, 사생활 역시 그 의존의 필요성, 정도, 상황에 따라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장에서 고가의 돌봄 상품을 구매할 수 없어도, 모든 노년이 좋은 돌봄을 공적 권리로 주장하고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은 이제 절대 회피할 수 없는 시대의 과제다, 요양시설을 이러한 공적 돌봄 서비스가 잘 제공되는 장소로 만드는 건, 그곳을 새로운 거주지, 즉 집으로 이해하고 감각하는 것과 맞물린다. 집은 물리적 장소인 동시에 상징적이고 상상적인 장소다. 요양시설과 집을 계속해서 서로 적대적인 두 개의 공간 내지는 장소로 의미화하는 건, 노년의 돌봄 의존을 어렵게 만들거나 적절한 돌봄을 다양하게 상상하고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 더 깊이 성찰하고, 더 많은 다양성을 실험해보기 위해서라도, 돌봄의 공공화를 제대로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집이나 사생활, 신뢰 속에서 돌봄 주고받는 관계 등에 관해 계속 다시 질문하고 다시 답하는 걸 멈추지 말아야 한다.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상임대표
일다 2023년 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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