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봄의 혁명에서 봄의 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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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4-04-01 18:49 조회1,8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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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블러드 하이스쿨의 교실 열기가 뜨거웠다.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우리 일행의 대표인 김현호 성공회 신부가 인사말을 했다. 누군가 한국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신부님이 물었다. “한국에 가고 싶어요?” 학생이 대답했다. “한국 가서 공부하고 싶어요. 일하고 싶지는 않고요.”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 다음 날 오전, 국경 근처 미얀마식 불교사원을 찾았다. 한국에 일하러 왔다가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됐다는 꼬봉윈(가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불교 신자지만, 불심을 버려야 악마가 보입니다.” 문득 이 슬픈 싸움이 끝나면 승려가 되어 업보를 참회하겠다던 미모뚜씨의 말이 생각났다. 이번 방문은 그녀 덕분에 가능했다. 일이 한 단계씩 진척될 때마다 우리는 서로 말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라고.
지난 2월19일부터 24일까지 5박6일간, 우리 일행 여섯명은 미얀마 난민촌 방문을 위해 미얀마와 인접한 타이의 국경도시 매솟을 찾았다. 성공회 파주이주노동자센터 샬롬의 집이 주관하고, 파주미얀마공동체와 미얀마연대파주시민모임이 함께했다. 돈도 필요하지만 직접 와주면 큰 힘이 되겠다는 말에 나선 지지 방문이다.
시작은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였다.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벼랑 끝에 몰렸다. 수만명이 죽고 구금됐다. 사람들이 꺾이지 않고 저항했다. 시민불복종 운동과 시민저항군의 항쟁이 지금도 거세다. 2024년 2월 현재, 군부에 맞선 국민통합정부(NUG·엔유지)는 미얀마 도시 39곳을 통제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싸움을 ‘봄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미얀마인들의 굳센 싸움이 학살과 항쟁의 역사를 공유한 우리를 움직인 것 같다. 2021년 3월19일, 쿠데타를 규탄하며 지역에서 촛불을 들었다. 그저 마음뿐이라 무력감도 컸다. 작은 촛불이 씨앗이 되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마침 이주노동자센터에서 미얀마어 통역을 맡고 있던 미모뚜씨가 엔유지 한국지부에서 활동 중이었다. 그렇게 엔유지와 연결이 됐다.
쿠데타와 내전으로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피난민이 되고 실향민이 되었던 우리 부모, 조부모처럼. 2023년 6월 말 현재 185만명의 국내 실향민이 발생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난민도 많다. 선진국에서 잘 살고 싶어서 난민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 않다. 난민은 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 떠난다. 난민의 90% 이상이 선진국이 아니라 인접국으로 향하는 이유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다.
여러곳을 찾았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먼저 엔유지 관계자들을 만나 브리핑을 들었다. 난민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가장 많이 찾았다. 뉴 블러드 하이스쿨, 뉴 웨이브 러닝센터, 엘피스 스쿨 세곳인데, 대개 유치원부터 고교 과정을 다 갖추고 있다. 여성 청소년들을 위한 그룹홈 기숙사도 방문했다. 매콘칸 복지센터와 엘피스 스쿨 인근의 난민 마을에서는 난민들과 직접 만났다. 미얀마에서 투쟁 중인 활동가들이 국경을 넘어와 상황을 알려주었고, 현지 가정을 찾아 일상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미얀마에 대해 잘 모르니 보고 들었어도 정리가 어렵다. 몇가지 감상만 꼽는다. 첫째, ‘구호’의 문제다. 난민에게는 밥 한끼가 절실하다. 밥 구하는 자와 주는 자 사이에서 기울어짐이 있을 법하다. 복지센터에서 식량을 나눠줄 때였다. 난민들이 가족별로 쌀 포대와 식용유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함께 사진 찍자는 엔유지 관계자의 권유를 우리 일행은 사양했다. 막상 난민들은 맑게 웃었다. 밥의 엄연함과 삶의 존엄함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쉬운 답은 없지만 당장 할 일은 있다. 구호의 역할일 것이다.
둘째, ‘노동’의 문제다. 난민도 결국 일해야 한다. 절대다수의 난민이 미등록 상태에서 불안정 노동으로 생계를 잇는다. 근로조건의 열악함은 물론이고, 수시로 단속도 된다. 엔유지가 애써도 타국 땅이라 한계가 뚜렷하다. 지역 경제가 난민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추방되지는 않고, ‘내막’을 거쳐 풀려난다고 한다. 고통이 따르는 것은 물론이다. 김현호 신부의 말처럼 “숲속의 난민을 생각하며 왔는데, 도시 속 이주노동 문제를 만났다.”
셋째, ‘교육’ 문제다. 난민들도 자녀 교육에 열심이다.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던 아이들을 떠올리면 배움에 대한 열망이 다르랴 싶다. 남을 누르겠다는 경쟁의 욕망과,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희망이 같을 수 없다. 학력 인정을 못 받으니 대학 진학 등 난제가 많다. 그래도 흙바닥 야외 교실에서 아이들은 배우고 춤추고 웃었다. 우리도 같이 웃었다.
이 모든 기쁨과 고민을 가능하게 해준 사람들이 있다. 바로 독자들이다. 지난해 9월13일치 한겨레 칼럼 ‘우리끼리 드는 촛불도 힘이 될까’에서 난민촌 방문 계획을 알리며 도움을 부탁했다. 계좌로 846만5천원이 모였다. 파주미얀마공동체가 35만원을 보탰고, 오마이컴퍼니를 통한 펀딩과 개별 후원을 통한 469만원을 합쳐 총액 1350만5천원이 모였다. 100만원 상당의 물품도 익명으로 후원받았다. 엔유지에 약속한 500만원을 훌쩍 넘겼다. 엔유지와 상의해서 500만원을 뉴 블러드 하이스쿨에 7만3750밧, 뉴 웨이브 러닝센터에 5만밧으로 나눠 지원했다. 환전 비용이 들었다. 물품도 지원했다. 예상을 뛰어넘은 후원에 조금 놀라고 많이 기뻤다. 남은 후원금을 포함해서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으려 한다.
내내 원조의 윤리에 대해 고민했다. 사진 촬영 수준을 넘어 훨씬 깊은 윤리적, 현실적 고려가 필요하다. 지금은 고민뿐이지만 차차 방법을 찾고 싶다. 학교에서, 복지센터에서, 난민 마을에서 아이들은 웃었고, 어른들은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서 꾸밈없이 환대받았다. 어디에나 개와 고양이들이 가득했다. 결핍의 장소에서 사람들은 아이를 낳고, 동물과 먹을 것을 나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원조의 원리가 넘치는 것을 나누는 것이라면, 연대의 윤리는 부족한 것을 나눔으로써 넘치는 것이라고. 그러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연대해주신 모든 분들께 미얀마의 친구들이 전한 감사의 진심을 전한다. 봄의 혁명이 봄의 연대로 이어지는 3월, 봄이다.
조형근 사회학자
한겨레신문 2024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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