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멋대로 그려본 하나의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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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8-29 16:05 조회22,24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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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핏빛 기억으로 나라가 온통 충혈되어 있던 한 시절이 있었다. 총칼로 권력을 탈취한 자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산천초목도 가지를 움츠리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적잖은 세월이 흐른 오늘 그 학살의 주역이 이번에는 한낱 초라한 경제사범이 되어 연일 언론을 어지럽히고 있다. 놀랍다면 한때 나라를 주름잡던 독재자가 검찰로부터 전방위적 추달을 당하고 있는데도 별다른 정치적 파장이 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승만·김구·박정희·김대중·노무현 등 지도자들은 사후 세월이 흘렀음에도 언제든 다시 논쟁의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는 정치적 쟁점의 소유자이다. 이에 비해 전두환은 그런 의미의 평가가 종결되고, 다만 부정한 재산 숨기는 재주만 속속 드러나 오명을 더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시비에스> 라디오의 <김현정의 뉴스쇼>(7월23일)와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8월13일)에 잇달아 출연한 최환 변호사는 1995년 당시 자신이 서울지검장으로서 전두환 비자금 수사를 지휘했던 내용에 관해 증언한 바 있다. 최 변호사에 따르면 전두환은 기업가들한테 대략 9500억원 정도를 거두어 민정당 창당 자금, 새마을 지원금 등 이른바 통치자금으로 쓰고 남은 2205억원을 사적으로 착복했다고 한다. 그때 추징금을 환수할 수 있었으나 외압으로 수사가 중단되었고, 1997년 1월 전두환 특별수사팀은 사실상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나 같은 문외한의 상식으로는 추징금 환수 자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당시 외압의 실체가 어떤 것이었는지 밝히는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거·현재를 불문하고 정치의 이면을 지배하는 검은돈의 내막을 파헤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대부분의 언론은 검찰이 흘리는 전두환 일가의 재산내역 보도에 만족하고 정작 그 전후의 심층적 맥락을 탐색하는 일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전두환이 정치자금 거두는 수법을 배운 것은 박정희에게서였다. 10·26 직후 청와대에 남은 돈 6억원을 박근혜에게 전달한 것이 전두환이라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두환 비자금 수사가 김영삼 정부에서 중단된 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 15년을 무사히 지나 왜 박근혜 정부 들어 본격화되었는지 당연히 의문이 든다. 박 대통령 자신이 그 점에 관해 이전 정부들의 직무태만을 비판한 바 있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다양한 추리가 동원될 수 있을 텐데, 가능한 추리 가운데 하나는 검찰이 부정한 재산을 토해내도록 전두환 일가를 압박하고 있음에도 다수 국민이 거기서 역사적 정의의 실현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1980년대 내내 박근혜가 ‘사가(私家)에 위리 안치된 공주’ 같은 신세였던 것을 상기하면 풀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
사실 누가 보든지 돈 문제에 관해서라면 전두환과 비교할 수 없는 전문가가 이명박이다. 2007년 대선 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비비케이(BBK) 사건부터 퇴임 직전의 내곡동 사저 문제까지 그는 대통령이라는 지위 때문에 충분히 조사 또는 수사되지 않은 허다한 의혹들의 주인공이다. 이명박 정부 말기에 다수가 정권교체의 필연성을 예감한 것은 무엇보다 정권의 도덕성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 때문이었다. 따라서 2012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여당의 참패는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생각과 사람과 이름까지 바꾸게 된다면 우리 당은 완전히 새로운 당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고, 결국 말한 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성공에는 이명박의 절묘한 기여가 개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짐작건대 그는 전임자들, 그중에서도 노무현이 당한 곤경에서 결정적인 교훈을 학습했을 것이다. 정보업무의 경험이 전무한 서울시 공무원 출신에게 국가정보의 총책을 맡긴 것부터가 임기 후를 내다본 포석이고 국가 안보보다 개인 안보를 중시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러므로 박근혜 정부에 걸려 있는 이명박의 불의한 구명 고리를 벗겨내는 것이야말로 이 정부가 두 번째 6개월에 해야 할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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