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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명함-이름은 순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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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8-29 16:33 조회21,8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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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90㎜, 세로 50㎜짜리 반듯한 직사각형 흰 종이에는 이름과 연락처, 사회적 소속만이 적혀 있다. 나머지는 흰 여백이다. 그는 이 사물을 건네면서 거기에 쓰인 ’이름 그대로’ 스스로를 ’호명(呼名)’한다.

명함(名銜)의 ’명(名)’은 이름을, ’함(銜)’은 옛 사람들 서명인 수결(手決)을 뜻한다. 오늘날 명함은 한 개인의 사회적 정보를 소개하는 물건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명칭에서 보듯이 이 사물의 핵심은 본래 ’이름’에 있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백은 이름이 이 사물의 중심임을 환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본질적으로 보면, 명함은 거기에 적힌 이름과 본인이 일치함을 확인시키는 사물 그 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젠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지만, 명함을 교환하는 행위는 사실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명함 교환은 익명(匿名) 세계에서 이름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행위가 아닌가. 글자와 자신이 일치함을 확인시키는 이 행위에는 사실 확인 이상의 윤리적 무의식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이 사물에 새겨진 이름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며, ’나’는 그 이름에 합치되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증언이자 선언이다.


이름과 실제의 합치를 뜻하는 ’명실상부(名實相符)’라는 사자성어에도 이런 생각의 흔적은 남아 있다. ’상부(相符)’란 ’부신(符信)’이라 하여 반씩 쪼개어 나누어 가졌다가 나중에 맞춰 보는 신뢰 표지의 확인을 뜻한다. 이 물건과 합치되는 존재가 ’나’이므로, 나를 ’믿어 달라’는 뜻이다.


희랍인은 ’고백’이나 ’선서’를 ’입이 실제와 똑같은 것을 말한다’는 뜻인 ’호모로게인(homologein)’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느님에게 바치는 고해성사 역시 말과 실제를 절대적으로 일치시키는 호모로게인의 제도적 형식이다.


이름에 관한 증거를 서류철에 집적해 놓은 주민등록증과 달리, 명함 교환은 거기에 쓰인 이름이 정말 ’나’이며 ’이 사람’일 거라는 믿음만으로 이뤄진다. 신용보증을 위한 온갖 정교한 장치들이 고안되는 시대지만, 여기에서 교환되는 것은 원시적일 정도로 우직한 무형의 신뢰뿐이다.


그러고 보면 명함의 전형적인 얼굴이 흰 눈과 같은 색인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함돈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매일경제, 2013.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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