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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준필] 주공(周公)의 노(魯)나라, '춘추(春秋)'의 기준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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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0-23 16:16 조회21,4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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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의 아들 백금(伯禽)이 봉지(封地)인 노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지 3년이 흘렀다. 그제서야 백금이 주공을 찾아와 보고를 올린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주공이 묻는다. “그곳의 풍속을 바꾸고 예법을 고쳤습니다. 3년이 지나서야 상복을 벗느라 늦었습니다.” 백금의 말을 듣고 주공은 길게 탄식한다. 앞서 다녀간 강태공이 떠올랐던 탓이다.


제나라의 태공은 백금과 달랐다. 부임 5개월 만에 주공을 찾아왔다. 주공이 물었다. “어찌 이리 빨리 오셨소?” 확신에 찬 목소리로 태공이 답했다. “그 지역의 풍속을 따랐습니다. 자연히 예의는 간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주공은 노나라의 앞날이 순탄치 않으리라 직감한다. “아, 훗날 노나라가 제나라를 섬기게 될 것이다. 정치가 간명할수록 백성들과 가까워지는 법이다.”


주공의 예상은 비교적 적중했다. 제나라는 큰 나라로 성장했고 노나라는 늘 제나라의 위력을 의식했다. 그렇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제나라도 편안한 시절이 드물었다. 제나라의 다섯 번째 군주 애공(哀公)의 비참한 최후가 그 빌미가 된다. 기(紀)나라 제후가 애공을 모함했고 그것을 믿은 주나라 이왕(夷王)이 애공을 끓는 물에 빠뜨려 삶아 죽였다. 그런 다음 이왕은 애공의 이복동생 호공(胡公)을 제후로 세웠다. 호공은 도읍을 영구에서 박고(薄姑)로 옮겼다.


도읍을 옮기자 기존 세력의 반감이 커졌다. 이를 계기로 애공의 동복 동생 산(山)이 호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다시 수도를 임치(臨淄)로 되돌렸다. 이 사람이 헌공(獻公)이다. 헌공의 뒤를 무공(武公)과 여공(?公)이 이었는데, 죽은 호공의 아들이 등장하여 여공을 살해하고 자신도 죽는다. 여공의 아들인 문공(文公)이 군주가 되어서는 아버지 여공의 살해에 가담한 세력 70명을 색출해 죽여 버린다. 돌이켜 보면 지난 시절 천자 이왕이 애공을 죽인 사건으로 인해 계속 된 피의 복수였다.


그런데 문공의 손자인 장공(莊公) 24년, 서쪽 견융(犬戎)이 쳐들어와 주나라 유왕(幽王)의 목을 벤다. 주 왕실은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천자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다. 제나라 장공의 아들 희공(釐公) 9년, 드디어 주공의 노나라에서 은공(隱公)이 즉위한다. 노나라 은공의 등장은 제후들의 쟁패로 얼룩지는 춘추시대의 개막을 뜻한다. 춘추시대라는 이름의 기원인 역사서 <춘추>가 노 은공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작고 약한 나라라서 늘 강대국에게 시달렸지만, 춘추시대의 역사 서술만은 노나라 스스로가 기준이 된다. <춘추>의 첫 대목은 ‘은공 원년’이다. 하지만 이런 노나라라 한들 그 실상에서는 제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춘추>의 첫 페이지를 연 노 은공의 최후도 아우 환공(桓公)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춘추’가 혼란의 시대로 기억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인가 보다.

류준필(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교수)
(건설경제신문, 2013.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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