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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종선] 더 많은 똥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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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0-23 15:07 조회20,0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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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김두식 지음
교양인 펴냄(2004)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과 뒤이은 총선 열풍 직후였다.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초유의 사건도 그랬지만 그뒤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헌법재판소 판결 등 나라의 명운이 ‘법’과 그 법을 다루는 소수의 엘리트들의 손에 달렸던 순간들이 이어짐에 따라 법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져 갔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우리에게 법은 딱딱하고 골치 아픈 것이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은 것이었다. 법에 관한 책, 더구나 ‘헌법’이라는 재미없는 단어를 제목에 넣은 책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하기만 했다. 그것은 근엄한 법조인, 점잖은 지식인의 틀을 깨고 자신의 깊은 내면을 기꺼이 드러낸 지은이 김두식의 힘이었다. <헌법의 풍경>과 더불어 한국의 인문서는 한 단계 진화했다.

문장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나 같은 편집자의 눈에 법은 어떤 것일까. 이 책에 나와 있는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이나 갖가지 이상야릇한 법률 용어를 다시 인용할 필요는 없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사법 현장에서는 각종 서면과 문장의 역할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인데, 다들 알다시피 서울 서초동에 가보면 법정 드라마에서처럼 검사와 변호인이 치열하게 설전을 벌이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법정에는 늘 30㎝ 높이의 문서들이 쌓여 있고, 판사를 비롯한 공판정의 주연들은 사람의 얘기를 듣기보다는 골무를 낀 손으로 서류철의 문서를 넘겨 보기에 바쁘다.


그 문서들은 한국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대개는 두세 번 읽어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어렵고 생경한 법률 용어들은 많이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주술 실종의 문장 구사는 여전하고, 무엇보다 법률가들끼리 이해하면 그만이다. 법은 그래서 시민들 위에 군림하고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인식되어 왔다. 이는 종종 법조인들의 권위의식과 연결된다. 한국 사회에서 법조인은 정치인 못지않은 특권의식과 우월의식의 체현자였다. 지은이 김두식이 직접 겪은 군법무관 군사훈련 시절 동료 훈련생(사시 합격자)들의 권위적 행태는 이런 치부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지은이는 그래서 ‘똥개 법률가’가 필요하다는 무엄한 주장을 한다. 특정 고교와 대학, 그리고 사법연수원을 함께 나온 ‘순혈적인’ 엘리트들의 깊은 결탁을 깨기 위해서는 갖가지 잡종 인자들이 섞인 ‘똥개’ 법률가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양한 연령에 다양한 학교, 다양한 전공 출신으로 장애인운동, 시민운동, 노동운동, 생활운동에 종사하는 법률가들이고, 군림하는 자의 우월의식이 아니라 ‘청지기의 윤리’를 지닌 야생의 율사들이다.

<헌법의 풍경>이 처음 출간된 10년 전과 지금은 여러모로 상황이 달라지고 개선된 점도 적지 않다. 그러나 바뀌지 않은 부분이 바뀐 부분보다 더 많은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내란음모죄’라는 먼지 묻은 법률 용어가 다시 햇빛을 보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왕조시대의 ‘역모죄’가 지닌 공포와 허무를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랄 수밖에. 이 책의 현재적 존재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이 책은 우리의 어두운 과거를 회고하는 역사의 문헌이 될 것이다.


염종선 창비 편집국장
(한겨레, 2013.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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