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준필] 주공(周公)의 길, 태공(太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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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0-23 16:15 조회21,38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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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이 은(殷)을 멸하고 주(周)의 세상을 열 때 무왕의 곁에는 항상 두 사람이 같이 했다. 한편에는 선대 문왕 시절부터 재상이었던 강태공이 있었고, 다른 쪽엔 무왕의 친동생 주공(周公)이 있었다. 병법과 계략에 밝은 강태공은 문왕 이래 등용한 인재의 상징이었고 주공은 주나라 종친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무왕은 즉위하자마자 강태공을 사(師)에 임명하고 주공을 보(輔)로 삼았다. 왕족 세력과 관료 세력의 통합을 도모하겠다는 뜻이었으리라.
이 두 사람은 무왕을 도와 전장을 누볐다. 강태공이 앞장서서 은나라 주(紂) 임금의 폭압에 맞서자며 제후들을 규합했다. 은(殷)을 패망으로 이끈 목야(牧野) 전투에서 강태공은 노구를 이끌고 선봉에 선다. 무왕의 군대가 들이닥치자 은나라 군대는 무기를 거꾸로 돌리며 길을 터준다. 함락된 은(殷)의 도성을 들어설 때 무왕의 좌우로는 주공과 필공(畢公)이 따랐다. 주공의 손에는 큰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주공은 언제나 형 무왕의 그림자였다. 혁명 직후 무왕의 고뇌를 들어준 이도 주공이었고, 무왕이 병이 들자 형을 대신하여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하늘에다 기원한 사람도 주공이었다. 무왕이 죽자 주공은 어린 조카 성왕을 대신해 정사를 주관하였고, 3년간에 걸쳐 종친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 무렵 강태공은 주나라 도성을 떠난 지 오래였다. 저 동쪽에서 제나라의 기틀을 닦으며 이런 사정을 듣고 있었다.
주나라의 초석을 다지는 과업은 주공의 몫이었다. 무력이 있어야 혁명에 성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을 주공은 잘 알고 있었다. 관제 개혁을 통해 새로운 행정 질서를 마련하고, 예악(禮樂)의 덕화(德化)로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다. 이후로 주공은 문치(文治)의 이상을 설계한 인물로 평가된다. 제나라의 강태공은 전혀 다른 노선을 취했다. 상업ㆍ공업ㆍ어업 등 실업을 진흥하고 예제(禮制)를 간소화하는 등 실용적 기풍을 진작했다.
주공의 봉토는 태산 가까운 노나라였다. 주공은 성왕의 섭정이라 노나라로 부임하지 않고 주나라 도성에 머물렀다. 대신 아들 백금(伯禽)이 노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태산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노나라가, 동쪽에는 제나라가 자리했다. 한 나라는 예악의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했고, 다른 나라는 부국의 실용주의를 추구했다. 주공의 길과 강태공의 길, 이 둘은 오늘날까지도 묘한 평행선을 이루며 출몰한다. 늘 그렇듯이 ‘옛날’이 ‘옛날’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류준필(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교수)
(건설경제신문, 2013.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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