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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부족해서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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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0-25 14:03 조회23,4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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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대학가에서 많이 불리던 노래 중에 ‘딸들아 일어나라’라는 노래가 있었다. “사랑도 행복도 다 빼앗겨 버리고 참아왔던 그 시절 몇몇 해”같이 신파스러운 대목도 있었지만, “이 땅의 노동자로 태어나 자랑스러운 딸로 태어나”로 이어지는 가사가 인상적이었다. 단지 부끄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자랑스럽다”는 표현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남자 선배 하나가 기가 차다는 듯 “야, 딸로 태어난 것이 무엇이 그렇게 자랑스럽냐?”고 물었다.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노동자로 태어난 게 자랑스럽다는 건 안 이상하세요?”쯤 되었던 것 같은데, 한창 노동자야말로 역사를 만드는 주체라 믿던 시절이었으니 선배가 무안해하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최근 들어 잊고 있던 그 기억이 떠오른 것은 경기도 평택비정규노동센터에서 지역 내 중고생을 대상으로 해 “노동자는 ( )이다”를 채워 넣으라고 했더니 “노동자는 외국인이다” “노동자는 거지이다” “노동자는 장애인이다” 등의 결과가 나왔다는 기사를 보면서였다. 그러더니 곧이어 서울대 학생들이 지역균형발전 전형으로 들어온 지방 학생들을 “지·균충”으로 부르며 멸시하거나, 면전에서도 “서울대 거저 들어와서 좋겠다”고 한다는 기사가 나오는 게 아닌가.

사실 개별 사례들을 보면 신문에 그렇게 대서특필된 것이 기자들의 침소봉대같이 느껴지는 지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기사를 보면서 심상해지기 어려운 것은 학교에서는 동성애자나 성적, 가난 등 각종 이유로 차별이 끊이질 않는가 하면, 임산부의 날이 국가기념일이라면서도 일터에서는 임산부를 향한 횡포가 끊이질 않을 뿐 아니라, 아쉬워서 부른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도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하는 상황이 전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라는 데가 조금이라도 약자로 보이는 순간 조롱과 멸시를 피할 수 없다는 게 뭐 딱히 신문을 봐야 알 정도로 드문 일인가 말이다.

그 대척점에 있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이란 사실 일한 것보다 많이 벌고, 다른 사람의 삶터를 파괴해서 얻은 전기를 돈 걱정 안 하고 쓸 수 있으며, 일상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노동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껏 소비하고 향유할 수 있는 소비적인 삶이니, 남의 고혈 위에 얹혀사는 삶이라고밖에 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바람직하냐를 떠나서 제약 없이 소비하고 노동하지 않고 향락만 누리는 삶이라는 게 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또한 갑과 을이란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세상에 갑을을 나누는 기준이 하나인 것도 아니다. 집 밖에서 을이 집안에서 갑이 되고, 공장에서 을이 가게에 가서 갑질을 한다. 물론 갑을은 결국 갑을병정무기경신으로 나갈 수 있는 연쇄적인 관계인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노동자라면서 장애인을 얕보고, 여성이라면서 성소수자에게 등 돌리는 서로 간에 득 볼 일 없는 경쟁은, 그래서 차라리 처량할 지경이다.

그러니 을로 사는 것의 억울함을 알지만 때론 나 역시 갑질을 하기도 함을 아는 것, 그래서 내가 갑이 되기보다는 갑을로 이루어진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많이 가졌으니 나누자는 것도 훌륭한 태도이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내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면 한계에 부닥치기 십상이다. 세상에 많이 가지지 않은 것 같은 사람이 오히려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게 남이 얕보는 나의 약점이야말로 내가 나를 넘어서 타인과 연대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밑천이라고 할 것이니, 부족함을 자랑스러워해도 좋지 않겠는가.

백영경 방송통신대 교수·문화인류학
(한겨레, 2013.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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