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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면도기-자연에서 사회로 입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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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0-30 15:46 조회21,6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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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선배가 문학상을 받았다. 야인적 기질로 유명했던 그가 `사회`이기도 한 문단에서 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동료들에게 축하의 대상인 동시에 특별한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수상식장에 나타난 그의 얼굴은 낯설었다. 늘상 `털보`였던 그의 얼굴이 면도로 말쑥해졌기 때문이다.


사회라는 무대에 공식적으로 올라가야 할 때, 대부분 남자가 거의 예외 없이 제거하는 것이 바로 `수염`이다. `야인`이었던 선배 얼굴도 면도라는 통과의례를 거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면도기는 사회 입문식에 쓰이는 제의적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염이 깎인 얼굴을 보면 사회는 일단 그가 사회 바깥의 야인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아마도 `털(수염)`에서 환기되는 야생적 이미지가 제거됨으로써 문명인의 무의식에 내재된 불안감을 안심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면도기는 칼날이 표면으로 노출되지 않게 디자인되어 있지만, 면도기의 물리적 본질은 예리한 `칼` 이상이 아니다. 면도기는 신체에서 가장 먼저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얼굴에 칼을 댐으로써, 야성의 표식을 질서화된 사회의 표지판으로 변형시킨다. 면도한 얼굴은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겠다는 공인인증서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면도는 머리를 깎는 행위와는 다르다.

머리를 깎는 극적인 상황의 주인공을 떠올려 보자. 실연한 여자. 스님이 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한 사람. 삭발 투쟁을 하는 시위자도 있다. 이 상황은 중대한 결심을 상징한다. 어제의 시간, 자기가 묶인 사회에 `결별`과 `단절`을 선언한다. 반면 면도기가 절실한 주인공은 기업 임원들과 면접을 앞두고 있는 신입사원이다. 사회를 `버리기 위한` 행위가 머리를 깎는 것이라면, 사회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면도기다.

 
 

신화ㆍ인류학자 엘리아데에 따르면 초월적 제의는 문명인의 세속 한가운데서도 의식되지 못한 채 반복된다. 그러나 `초월`의 욕망은 속(俗)에서 성(聖)스러움의 방향으로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면도기는 `자연`의 인간을 `속`의 인간으로 수정한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매일경제, 2013.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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