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자기부정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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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1-01 15:13 조회21,53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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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저녁 <교육방송>(EBS)의 제10회 국제다큐영화제 출품작의 하나로 방영된 드로르 모레 감독의 <게이트키퍼>(The Gatekeepers)를 본 것은 내겐 뜻밖의 수확이었다. 영화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베트(Shin Bet)의 퇴임 수장 6명과의 인터뷰를 바탕에 깔고 사이사이에 관련된 기록 사진과 동영상을 배합하여 사실성을 더했고, 이를 통해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목숨을 걸고 부딪쳐온 현장을 목격하는 듯한 생동감을 경험하게 했다. 이스라엘 정보기구 모사드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능가하는 조직이란 얘기는 진작부터 들었지만, 국외 담당인 모사드와 쌍벽을 이루는 국내 담당 신베트에 대해서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끝없는 유랑과 가혹한 박해에 시달려 왔다. 오늘의 로마(집시)들처럼 그들은 수십 수백 년 동안 정들이고 살던 땅에서 강제로 추방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선라이즈 선셋’의 애절한 선율로 유명한 작품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 그려져 있듯이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에서도 수많은 유대인들은 하루아침에 그동안의 삶의 보금자리를 떠나야 했다. 초대 다비드 벤구리온부터 제7대 이츠하크 샤미르까지 일곱 사람의 총리 중 여섯 사람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 등 옛 소련 지역 출신 이민자라는 사실은 왜 그들이 국가의 운명을 언제나 풍전등화처럼 느꼈는지, 또 신베트가 왜 그처럼 무자비한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납득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게이트키퍼>는 철저히 이스라엘의 입장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신베트 책임자들은 테러 공격의 예방을 위해 강압적 수사가 불가피했음을 주장하고, 때로는 용의자에 대한 역테러의 감행도 어쩔 수 없었다고 강변한다. 잘못된 정보나 기술적 오류로 인해 무고한 민간인을 폭격했을 때도 그들은 이를 ‘부수적 피해’라는 기만적 용어로 덮고 넘어간다. 하지만 이 모든 범죄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게이트키퍼>에 따르면 신베트는 국가 안보 이외의 다른 정치적 또는 정파적 이해에 휘둘리지 않는 조직임이 분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테러와 살육으로 점철된 수십 년 분쟁의 세월을 보낸 끝에 신베트 책임자들은 한결같이 팔레스타인과의 공존만이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한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말한다. “설사 무례하게 나오더라도 적들과 대화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곧이어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우리는 점점 더 잔인해져 갑니다. 같은 동족에게도 그렇지만, 주로 점령 지역 사람들에게 잔인해져 갑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죠.”
이스라엘과 한국 중에서 어느 나라의 안보가 더 큰 위험 요소를 안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전문가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더 불안하다. 이스라엘은 국가의 성립 자체가 제국주의 시대의 불의한 유산이어서 그 역사적 부채를 늘 안고 지내야 하고, 아랍 세계 안에 섬처럼 고립되어 사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2000년 가까이 그 땅에 붙박여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도덕적 우위는 결코 무력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곤경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국가기관이 안보를 이유로 자국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선거에 개입하고 야당과 노조를 탄압한다는 말을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국의 안보가 낙관할 형편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미국·중국·일본이 만들어내는 삼각파도를 헤쳐가는 것은 그야말로 현명한 선택을 요구한다. 북핵 문제의 해결도 당연히 난제이다. 하지만 신베트의 한 전직 책임자가 자신들의 미래를 암울하게 내다본 데 비하면 한국의 조건은 이스라엘처럼 절대적 위기 앞에 놓인 것이 아니다. 그런 여유 탓인지 한국 정보기관의 종사자들은 국가 안보 불감증에 걸려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함부로 위반하고 있고, 그 책임자는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과 권력자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을 심각하게 혼동하고 있다. 스스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짓에 앞장서고 있으니, 이 역설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10. 27.)
잘 알려져 있듯이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끝없는 유랑과 가혹한 박해에 시달려 왔다. 오늘의 로마(집시)들처럼 그들은 수십 수백 년 동안 정들이고 살던 땅에서 강제로 추방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선라이즈 선셋’의 애절한 선율로 유명한 작품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 그려져 있듯이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에서도 수많은 유대인들은 하루아침에 그동안의 삶의 보금자리를 떠나야 했다. 초대 다비드 벤구리온부터 제7대 이츠하크 샤미르까지 일곱 사람의 총리 중 여섯 사람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 등 옛 소련 지역 출신 이민자라는 사실은 왜 그들이 국가의 운명을 언제나 풍전등화처럼 느꼈는지, 또 신베트가 왜 그처럼 무자비한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납득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게이트키퍼>는 철저히 이스라엘의 입장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신베트 책임자들은 테러 공격의 예방을 위해 강압적 수사가 불가피했음을 주장하고, 때로는 용의자에 대한 역테러의 감행도 어쩔 수 없었다고 강변한다. 잘못된 정보나 기술적 오류로 인해 무고한 민간인을 폭격했을 때도 그들은 이를 ‘부수적 피해’라는 기만적 용어로 덮고 넘어간다. 하지만 이 모든 범죄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게이트키퍼>에 따르면 신베트는 국가 안보 이외의 다른 정치적 또는 정파적 이해에 휘둘리지 않는 조직임이 분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테러와 살육으로 점철된 수십 년 분쟁의 세월을 보낸 끝에 신베트 책임자들은 한결같이 팔레스타인과의 공존만이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한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말한다. “설사 무례하게 나오더라도 적들과 대화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곧이어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우리는 점점 더 잔인해져 갑니다. 같은 동족에게도 그렇지만, 주로 점령 지역 사람들에게 잔인해져 갑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죠.”
이스라엘과 한국 중에서 어느 나라의 안보가 더 큰 위험 요소를 안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전문가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더 불안하다. 이스라엘은 국가의 성립 자체가 제국주의 시대의 불의한 유산이어서 그 역사적 부채를 늘 안고 지내야 하고, 아랍 세계 안에 섬처럼 고립되어 사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2000년 가까이 그 땅에 붙박여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도덕적 우위는 결코 무력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곤경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국가기관이 안보를 이유로 자국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선거에 개입하고 야당과 노조를 탄압한다는 말을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국의 안보가 낙관할 형편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미국·중국·일본이 만들어내는 삼각파도를 헤쳐가는 것은 그야말로 현명한 선택을 요구한다. 북핵 문제의 해결도 당연히 난제이다. 하지만 신베트의 한 전직 책임자가 자신들의 미래를 암울하게 내다본 데 비하면 한국의 조건은 이스라엘처럼 절대적 위기 앞에 놓인 것이 아니다. 그런 여유 탓인지 한국 정보기관의 종사자들은 국가 안보 불감증에 걸려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함부로 위반하고 있고, 그 책임자는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과 권력자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을 심각하게 혼동하고 있다. 스스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짓에 앞장서고 있으니, 이 역설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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