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렬] 위험, 감추기와 없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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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1-01 15:17 조회21,63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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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지나가는 송전선을 지중화하자는 의견이 있다.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적극적이다. 분당에서 이미 고압선을 지하에 묻은 사례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의견이 무리한 것 같지 않다. 지상의 고압선과 땅속 고압선의 다른 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된 차이는 하나는 아주 잘 보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각이라는 감각을 통해서 인지되지 않으면 대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크게 떨어진다. 아마 밀양 송전선로 공사를 처음부터 지하선로로 계획했다면 큰 갈등과 희생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밀양 송전선의 지중화는 흉물스러운 것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감추는 것이다. 감추는 것은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이지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송전선이 땅속으로 들어가도 고압 전기는 계속 흘러간다.
현대사회의 큰 위험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방사능이 그 대표 격이다. 원자력발전소에는 큰 굴뚝이 없다. 화력발전소와 비교하면 청소가 필요없는 아주 깨끗한 발전소처럼 보인다. 1960년대에 석탄을 때는 발전소에서는 검은 연기와 재가 수시로 굴뚝에서 쏟아져나와 동네를 덮었다. 그때면 손으로 애써 한 빨래가 헛수고가 되었고, 방바닥은 몇 차례나 걸레로 훔쳐야 깨끗해졌다. 이런 면에서 1970년대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원자력발전소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에는 방사능이라는 훨씬 큰 위험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감추어져 있었을 뿐이다.
고압선 주위에서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발생한다. 땅속으로 들어가도 형태가 달라질 뿐이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의 측정에 따르면 땅속 고압선의 수직방향 자기장의 세기는 땅위 고압선의 경우보다 더 크고 측면방향 자기장의 세기는 훨씬 작다. 자기장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약해지므로 땅위에서는 송전선을 높이 매달면 강도를 좀 줄일 수 있다. 반면에 땅속으로는 깊이 들어가기 어렵다. 분당의 고압선은 지하 35m에서 80m 사이에 매설되어 있다. 밀양의 송전탑 높이는 약 140m다. 지중화가 보기 싫은 것을 멀리 치우는 장점은 있지만, 자기장의 피해를 줄인다는 면에서 항상 유리하지는 않은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위험 인지는 감각기관을 통해 시작된다. 송전탑이 보기 싫다는 것에서 시작해 그로 인한 건강상의 피해로 관심이 넓어지고, 고압선을 통과하는 전기를 생산하는 원자력발전소와 전기 소비자에게까지 나아간다. 눈에 보이는 철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공부와 성찰을 동반하고, 이는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의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보이는 것을 감추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도 필요하다. 언젠가 나는 서울의 옛 난지도에 시민들이 힘을 합쳐 높이 80m의 커다란 풍력발전기를 세우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곳의 생태를 담당하던 사람은 그 거대함에 놀랐는지 이 제안에 반대했다. 보이게 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밀양을 생각하면서 서울에 풍력발전기 세울 곳이 더 없는지 찾아보았다. 방해물이 적은 한강 한가운데가 적당할 것 같다. 수백m 간격으로 세우면 수십개는 충분히 놓을 수 있다. ‘원전 하나 줄이기’를 적극 추진하는 서울시장이 이런 제안을 하면 어떨까? 아마 아주 큰 찬반논쟁이 벌어질 것이다.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쪽에서도 한강의 경관과 생태계 훼손을 이유로 비난을 쏟아낼지 모른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런 논쟁이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런 논쟁을 통해서라도 에너지 소비 행태에 대해 많은 사람이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강 한가운데의 풍력발전기 건설은 경인운하나 4대강 사업보다 더 효용성이 높은 사업이다. 게다가 서울시에서는 원전 하나 줄이기 운동을 벌이고 있으니 이런 계획을 논쟁에 부쳐 시민들의 에너지 의식을 뒤집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밀양 갈등의 근본 원인은 원자력발전소와 끝없이 늘어나는 전기 소비에 있다. 그러므로 지중화를 통해서 보기 싫은 것을 감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걸 없애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없애는 것이 새로 보이는 것을 만들어낸다면 이걸 받아들일 준비도 해야 한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3.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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