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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영] 봉준호 바깥의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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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2-02 14:06 조회19,1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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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에 대해 섣불리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그 결말에 대하여

보안 전문가 남궁민수(송강호)와 반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마침내 설국열차의 지배자 윌포드(에드 해리스)와 기차의 엔진이 거처한 최전방 칸의 문 앞에 이르렀다. 커티스는 자신의 치욕스런 과거를 고백하고 참회한 뒤, 남궁민수에게 빨리 마지막 문을 열라고 재촉한다. 남궁민수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다른) 문을 열고 싶어. (열차의 벽면에 난 문을 가리키며) 워낙 오래 갇혀 살아서 저걸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좆도 문이란 말이지.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잔 말이지….”


이 대목에서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건 봉준호의 대사가 아니다. 물론 이 대사는, 그 서민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지적이며 급진적이다. 그는 지금 하층민의 봉기에 의한 권력 교체만을 생각해온 커티스에게 체제의 변혁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체제의 바깥을 꿈꾸는 형이상학적 결단을 제안하고 있는 중이다. 마침내 그의 딸 요나(고아성)에 의해 기차의 벽은 폭파되고 연이어 기차 전체가 붕괴된다. 체제가 폭파된 것이다. 요나와 흑인 소년 티미는 살아서 기차라는 체제 밖으로 나간다. 남궁민수의 제안이 실현된 것이다. 나는 다시 내 눈을 의심했다. 이건 봉준호의 결말이 아니다.


서사의 최종적 대의를 확정짓는 ‘진실’의 말들이 태연히 발설되고, 그것이 고스란히 실현되는 것. 이건 명쾌하지만 따분한 방식이다. 봉준호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저는 기본적으로 오해가 편해요. 서로 마주보고 진실을 말하는 장면을 쓰면 제가 부담스러워요.” “오해와 헛소동! 그것에 늘 끌려왔던 것 같고. 그런데 사회 내지는 세상은 그 모든 게 헛소동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지요.”(<씨네21> 800호, 2011년 5월)


봉준호의 서사에서 화살이 늘 과녁에 이르지 못한 건 조준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서사 내부에 과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녁은 오인의 연쇄 밖에 있었고, 목적지라고 여겨졌던 곳에 마침내 도착하지만 그것은 출발점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그사이에 사태는 조금 더 나빠져 있다. 봉준호의 영화적 기호들은 화살과 과녁의 메울 수 없는 틈에서 꿈틀거리며 출몰하는 유머와 외설과 불안과 공포의 능동적 사물들과 공간들이었다. 그런데 <설국열차>는 너무도 명료하게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는가.


봉준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자신의 미감과 취향을 숨긴 채 세계시장을 겨냥해 모호와 일탈의 중층적 서사를 폐기하고 선명한 메시지와 선형적 서사를 결합했다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 그런데 <설국열차>를 두 번째 보았을 때,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느꼈다. 여기엔 말해져야 하지만 말해지지 않은 것, 과도한 언사와 행위들, 그리고 근본적인 애매함이 잠복해 있다. 첫 만남 때의 당혹감은 의심해볼 만한 것이었다. 이 글은 그 의심에 관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냉담함


봉준호의 영화는 폐소공포증적 불안의 서사다. 물론 폐소(閉所)는 공간이 아니라 구조와 질서의 은유이며, 공포증과 불안은 인물들이 앓고 있는 개별 증상이라기보다 그 구조와 질서의 효과다. 인물들은 사건과 표적을 좇아 동분서주하지만, 사건은 다른 사건으로 옮겨다닐 뿐 해소되지 않고, 죄는 다른 죄로 계속 떠넘겨지며 주인공은 더 나빠진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봉준호 영화의 표정과 정조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폐소의 다층성이다. 그것은 소공동체의 율법이거나 한국의 지역정치학이거나 자본주의적 질서이거나 아니면 인간 존재 혹은 현실 세계 그 자체이기도 하다. 봉준호의 전작들은 어느 층위에서건 지역정치학을 불러들였지만, 폐소의 겹들이 가늠할 수 없이 두터워지고 한없이 깊어지면서 점차 정치적 진술들을 일종의 구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폐소는 심연이 되었고, 이 폐소의 거주자들에겐 외부로 향한 문도 미래의 전망도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인다.


사건의 지위도 달라진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발생하는 사건(개의 실종, 연쇄살인, 괴물의 살육, 의문의 살인)은 보통의 영화에서처럼 공동체를 교란하는 부정적 사태에 머물지 않는다. 봉준호는 회복되어야 할 안정된 공동체를 상정한 적이 없지만 최근작으로 올수록 공동체는 점점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망가져 있다. 차라리 사건이 이곳을 활성화시킨다. <마더>에 이르면 억제된 리비도이건 우리가 그 상실을 두려워하는 파토스이건 히스테리와 불안의 상태로 정체불명의 정념들이 이미 농축되어 있고, 살인사건은 공동체를 교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발 직전의 정념들의 출구가 된다. 끔찍한 사건과 만난 인물들은 종종 사건과 무관하게 달리고 또 달린다. 봉준호의 영화에는 사건의 선과 정념의 선이 일치하기보다 종종 분리되며 최근작으로 올수록 후자가 전자에 앞서 나온다.


<설국열차>의 원작은 마치 봉준호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외부와 절연된 폐소공포증적 공간, 세계 질서의 축약도와도 같은 내부의 계급 시스템, 전망의 완전한 실종과 하층민의 누적된 분노, 끝없는 질주의 운동이 모여 있다. 그러나 여기엔 결정적 제약이 주어져 있다.


봉준호는 공간의 표정을 포착하고 동선을 분할 조합하는 방면의 달인이다. 인물들은 하수구와 지하실, 골목길과 아파트, 들판과 공장, 숲과 논두렁을 쉼 없이 오간다. 봉준호는 서사 전개의 무리를 무릅쓰고라도 공간의 정조과 인물의 다양한 움직임을 결합한 신을 구성하고, 그 신들을 적절한 리듬에 따라 배열한다. 인물들은 사방으로 분할되었다가 일거에 다시 모이거나(<괴물>), 예측할 수 없는 공간을 따라 우회와 길 잃기를 반복한다(<살인의 추억> <마더>). 그런데 <설국열차>에는 일직선이라는 단일 동선밖에 주어져 있지 않으며 열차라는 단일 공간밖에 없다. 또 다른 제약은 폐소공포증이 공간과 질서 양면에서 이미 압도적인 것으로 주어져 있어, 정념은 분노와 좌절로 단일화한다.


이 단조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봉준호는 두 가지 선택을 한 것 같다. 하나는 각 열차칸의 톤을 다르게 만들어, 공간의 표정을 인위적으로 다양화하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와 KKK의 이미지, 그리고 팀 버튼 스타일의 과장된 인공미와 SF적 금속 이미지를 뒤섞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물들을 이질화하는 것이다. 윤리적 한계상황에 직면해 고뇌하는 구로사와적 영웅(커티스, 길리엄), 봉준호 스스로 세련화해온 시큰둥한 전문가(남궁민수)가 캐리커처적 표정으로 일관하는 만화적 인물(메이슨, 앤드류), 사이보그적 전사(프랑코)가 뒤섞인다.


봉준호는 전작들에서 신들을 구성하고 결합하면서 그가 점차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된 분산과 우회와 집중의 동학, 그리고 사건의 선과 정념의 선의 리드미컬한 배합을, <설국열차>에서는 이질적인 톤들의 결합으로 대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결합은 신들 사이에서, 그리고 신들 내부에서 사실상 동일한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 선택이 일견 산만하면서도 역동적이고 리드미컬하며, 그 과정에서 무거운 정념들을 축적했던 그의 전작들의 탁월한 조합과 배열이 지닌 장점을 잇지 못한다고 느낀다.


첫 시퀀스를 예로 들자. 꼬리칸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과 지배자들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이 시퀀스에서 봉준호는 마음만 먹었다면 분노의 정념을 폭발 직전 상태로 충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반대로 간다. 꼬리칸에 왕림한 총리 메이슨은 질서를 부르짖으며 잔혹한 처벌을 지시하는데 그의 우스꽝스런 표정과 동작은 이 장면의 긴장을 오히려 이완시킨다. 나중에 터미네이터처럼 싸우는 집행자 프랑코 형제의 동성애를 암시하는 장면도 감정을 분산시킨다. 이런 이질적 요소들의 조합을 멜로드라마적 감정 묘사에 대한 봉준호의 철저한 경계로 이해한다 해도, 그것을 대체할 다른 차원의 정념이 축적되는 것도 아니다. 봉준호는 관객에게 심드렁해지기를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전방 객차에 이르기까지 이질적인 톤의 조합이라는 패턴은 반복된다. 계급혁명이라는 가장 뜨거운 사건을 다루면서 봉준호에게 왜 냉담함에 가까운 감정이 필요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설국열차>가 봉준호의 실패작인지에 대해선 아직은 유보하고 싶다. 앞서 말한, 이 영화의 결말이 남겨준 인상 때문이다.


너무도 자명해 보이는 마지막 장면들로 돌아가보자. 남궁민수는 지금 자신이 마약중독자를 가장해 크로놀이라는 마약으로 폭발물을 만들어왔으며 그 폭발물로 벽/문을 폭파할 것이라고 커티스에게 말한다. 그런데 그의 말은 과연 전적으로 믿을 만한가? 바로 몇 장면 전에 커티스 일행이 피투성이 전진을 계속하고 있는 와중에도 남궁민수와 요나는 구석에서 크로놀을 정신없이 흡입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의 말이 맞다면 이건 완전히 불필요한 장면이다. 그는 의심할 수 없는 마약중독자다.


마약중독자이기 때문에 진실을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 기차의 불행은 이 마약중독자만이 진실을 본다는 데 있다. 남궁민수는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 <괴물>의 강두, <마더>의 도준처럼, 극중의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그러나 혼자만 진실을 보는 바보의 자리에 있다. 하지만 전작들의 어떤 바보에게도 없던, 체제를 폭파할 수 있는 무기를 남궁민수는 지니고 있다. 그것이 이 기차의 불행이다.


왜 불행인가. 여기서 <설국열차>가 정말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두 아이를 제외한 모든 생존 인류의 몰살, 설산 한가운데 내던져진 두 아이의 불투명한 생존. 이곳이 정말 목적지인가. 남궁민수는 커티스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말하면서, 기온이 지난 10년 동안 조금씩 올랐다고 주장했다. 눈 속에 파묻혀 있던 비행기가 10년 전에 비해 더 많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반의 끔찍한 처벌 장면을 통해, 기차 밖은 7분 만에 인간의 생체를 완전히 냉동시키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정말 기온이 올랐는가.


원작 만화에서는 바깥세상의 기온이 조금 오르지만, 기차의 지배자들은 공포의 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기온이 내려갔다고 발표한다. 이 기차의 생존자들에게 외부의 기온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는, 원작을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봉준호는 이것을 사실이 아니라 남궁민수의 진술로만 제시한다. 이것은 의도된 모호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그의 판단을 정말 믿을 수 있는가. 설사 믿는다 해도, 그것이 사람이 생존할 수 있을 정도의 기온 변화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흘려듣기 쉬운 또 다른 대목이 있다. 남궁민수는 기온 상승의 또 다른 근거를 말하려다, “뭐 그거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겠고…”라고 말꼬리를 흐린다. 그가 보았으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추측건대 그것은 결국 설국열차를 조각내는 눈사태일 수도 있고,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북극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남궁민수가 그것을 보는 장면은 없다.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총격전 와중에 깨진 유리창 구멍으로 날아든 눈의 결정체를 그가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면이다. 느린 속도로 공들여 촬영된, 이 영화에서 가장, 어쩌면 유일하게 아름다운 이 장면은 환각적이다. 눈의 결정체는 그에게 바깥세상의 유혹이다. 그 유혹의 정체는 어쩌면 죽음일 것이다. 추한 삶을 대체할 아름다운 죽음. 그는 정말 무엇을 본 것일까.


그러나 이 대목의 요점은 그가 말하지 않은 무엇이 아니라, 그가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는 지금 말하지 않음으로써 커티스만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도 진실의 유일한 목격자라는 지위를 은연중에 강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나는 다 알고 있어”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 우리에게 불안과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기묘한 게임이다. 적어도 한국 관객에게 남궁민수/송강호는 믿어야 할 사람이다. 그는 <괴물>에서 괴물을 가장 먼저 발견했고 바이러스가 없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알았던 아버지(강두/송강호)였고, 그때 괴물의 뱃속에서 죽었던 딸(현서/고아성)이 지금 다시 그의 딸로 돌아왔다. 비약을 무릅쓰자면 두 부녀는 비유컨대 지금 설국열차라는 괴물의 뱃속에 들어와 있으며, 아버지의 목적지는 괴물을 폭파해 딸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어쩌면 환각, 그렇다면…


남궁민수의 동기와 지식에는 상호텍스트적 권위가 주어져 있고, 봉준호는 마치 이 권위에 대한 관객의 믿음과 게임을 벌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를 믿도록 설정해두고 그 믿음을 은밀하게 흔드는 것이다. 여기서 고쳐 말해야겠다. <설국열차>에서 남궁민수의 자리는 봉준호의 전작들에서와 같은 바보의 자리가 아니다. 그는 환각 혹은 죽음의 충동에 사로잡힌 마약중독자와 진실의 유일한 목격자 어느 쪽에도 고정되지 않는다. 이 자리가 고정되지 않으면 우리는 <설국열차>가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는지도 알 수 없다. 남궁민수의 지식과 결단이 이 목적지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이 아니라 죽음의 설원에 도착한 인류 최후의 생존자인 두 아이가 눈밭을 걸어갈 때, 그들의 불안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북극곰이 언덕 너머에 나타난다. 우리는 북극곰이 사는 곳에 어린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지, 혹은 두 아이가 북극곰의 먹이가 될 가능성은 없는지 같은 현실적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이 결말을 파국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요나도 마약중독자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요나의 살인행위는 저지했지만, 마약은 즐겁게 나누었다. 눈부신 설백의 북극곰이 남궁민수가 홀린듯 바라보던 눈 결정체의 변주된 이미지라면 요나도 어쩌면 환각을 보고 있다.


이 목적지는 체제의 바깥/새로운 인류의 시작과 죽음에의 매혹/인류의 최종적 절멸, 어느 쪽에도 고정되지 않는다. 이 불확정성이 여전히 봉준호적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모종의 회피가 있는 것 같다. 봉준호의 전작들에서 우리의 고단한 주인공들이 표적이 사라진 목적지에 마침내 도착했을 때, 그 공허를 짊어지고 서사 밖을(<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혹은 보이지 않는 심연(<괴물>)을 응시하는 시선이 남겨져 있었다. <마더>에선 엄마 스스로 심연이 됨으로써 시선의 자리를 관객에게 이양했다. <설국열차>는 그 시선마저 모호화한다. 아마도 그 도착지가 그의 영화가 한번도 다루지 않은, 봉준호적 폐소의 외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공간의 불확정성은 미학적 기교가 아니라, 그것을 아직 말할 수 없다는 봉준호의 고백처럼 들린다.

허문영 문학평론가
(2013.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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