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준필] 문강(文姜), 품에 안을 수도 없고 저버릴 수도 없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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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0-23 16:22 조회22,77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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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라 은공(隱公) 6년(B.C 717), 노나라와 제나라가 처음 동맹을 맺는다. 주공의 노나라와 태공의 제나라가 처음 손을 잡은 것이다. 춘추시대 이전에 두 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호를 다진다. 주공과 태공의 기억이 아득해진 이후의 일이니, 주나라의 기원이 망각되면서 춘추시대가 시작된 것이라 하겠다.
그 이듬해 제나라 희공의 아우가 노나라를 방문한다. 두 나라 사이에서 처음 있는 외교 사절이었다. 몇 년 후 은공의 이복동생이 은공을 시해하고 노나라 임금이 된다. 환공(桓公)이다. 그리고 환공 3년(B.C 709) 가을, 공자 휘가 제나라를 방문한다. 제나라 제후의 딸 문강(文姜)을 환공의 부인으로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환공 6년 문강이 아들 동(同)을 낳는다.
환공이 문강과 혼인을 한 것은 형 은공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자신의 약점 탓이다. 다른 제후국이 성토의 빌미로 삼을 만한 사건이었기에, 환공은 제나라와 같은 강대국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불과 10여년 후 환공은 제 양공(襄公)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양공과 문강은 남매지간이었는데 서로 정을 통하는 관계였다. 이런 행실을 문제 삼아 환공이 문강을 질책하자 양공이 환공을 죽여버린 것이다. 파란만장의 춘추시대이기는 하지만 이 일은 희대의 사건으로 기억된다.
애초부터 제나라가 환공과 문강의 혼사를 추진한 것은 아니다. 그 전에 제나라는 정(鄭)나라 태자인 홀(忽)과 문강을 결혼시키려 했다. 그런데 홀은 이 혼인을 사양했다. 제나라를 권력의 입지로 활용할 기회를 거부한 것이기에 주위에서 의아해했다. 홀이 답했다. “나의 미래는 나에게 달렸을 뿐, 대국의 힘을 얻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在我而已, 大國何爲).” 그러나 홀은 정나라 임금 소공(昭公)이 된 다음에, 결국 쫓겨나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된다. 개인의 명예만 앞세우다가 나라의 기강을 흔들어 놓은 처신이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제나라의 결혼 제안을 거절한 결정이 현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강은 기억해 둘만한 여인이다. 자신과 결혼한 노나라 환공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신과의 결혼을 사양한 정나라 소공도 쫓겨나게 한 셈이다. 권력을 얻기 위해 여자를 활용하든 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여자를 거부하든, ‘정략결혼’은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 흔한 행태이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문강이라는 여인과 연루된 남성은 그 말로가 비참했다. 정나라는 인연을 거절했고 노나라는 인연을 맺었지만, 결국은 제나라의 존재감만 각인시켰다. 문강이 제나라 여인이 아니었어도 그러했을지, 그것을 누가 알겠는가
류준필(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교수)
(건설경제신문, 2013.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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