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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준필] 패자(覇者)의 최후, 제 환공(桓公)의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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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0-23 16:28 조회23,2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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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한 지 35년째 되던 해, 패자 환공은 규구(葵丘)에서 제후들의 회맹을 주재한다. 당시 천자에 해당하는 주(周) 양왕(襄王)이 그 자리에 재상 재공(宰孔)을 파견한다. 건국 시조 문왕과 무왕 제사에 쓴 고기, 주홍빛 화살, 그리고 큰 수레가 하사품으로 내려왔다. 여기에다가 양왕의 전언이 있었다. 엎드려 절하지 않고 받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환공이 그렇게 하려고 하자, 관중이 만류했다. 환공은 절을 올리고 하사품을 받았다.

주나라 왕이 공인할 만큼 패자 환공의 지위는 확고부동했다. 그 당시 환공에 대적할 만한 다른 제후국은 없었다. 패자로 오래도록 군림하면서 환공은 실질적으로 자신이 천자와 다름없는 역할을 한다고 자부했다. “옛날 하은주 삼대의 왕이 천명을 받은 것이 지금 나의 치적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昔三代受命,有何以異於此乎)” 그러면서 천자처럼 하늘과 대지에 제사를 올리려 했다. 역시 관중이 막아 중단되었다.

환공에게는 총애하는 신하가 셋 있었다. 늘 먹는 음식에 싫증난 환공이 색다른 맛이 없냐고 묻자 자기 아들을 삶아 국을 만들어 바쳤다는 역아(易牙). 위(衛)나라 출신으로서 업무에 몰두하느라 고국에 있는 어머니를 15년 동안이나 찾아보지 않은 개방(開方). 생식기를 스스로 잘라 환공 가까이 지내는 환관이 된 수도(?刀). 이들은 하나같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을 거스르면서까지 환공을 섬겼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관중이 충고했지만, 환공은 결국 듣지 않았다.

환공에게는 부인이 셋이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환공은 여색을 가까이 한 사람이어서 애첩이 적지 않았다. 여섯 명의 첩을 두었고 그들에게서 열 명의 아들을 얻었다. 그 열 명 중에 임금이 된 자가 무려 다섯 명이었다. 이것만으로도 환공 사후의 풍경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관중이 죽고 몇 해 지나 환공이 죽었다. 왕위 계승을 놓고 환공의 자식들이 서로 쟁투를 시작했다. 이 때문에 환공의 시신은 제나라 궁궐에 오래도록 방치되었다. 

환공은 주검이 되어 무려 67일이나 홀로 내버려져 있었다. 환공의 시체에서 구더기가 끓어 문 밖까지 기어 나왔다. 춘추 시대의 첫 패자였던 제나라 환공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남았다.

류준필(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교수)
(건설경제신문, 2013.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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