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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운] 오키나와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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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6-21 15:11 조회33,1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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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본섬의 최남단 이토만(絲滿)시에는 2차대전 당시 오키나와전의 희생자를 기리는 평화기념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겨울인데도 해양에서 불어오는 아열대성의 훈훈한 바람이 바다로 탁 트인 공원 뜰을 따사롭게 감돌았다.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이를 안고 가족과 함께 온 젊은 미군 병사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이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 불과 60여년 전 20만명을 넘는 희생자를 낸 격전지였다니, 새삼 마음이 숙연했다.

‘철의 폭풍(鐵の爆風)’이라 불리는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전쟁 중 일본 영내에서 벌어진 최대 지상전이었다. 1945년 3월 26일 미군의 케라마(慶良間) 열도 상륙으로부터 6월 23일 남부전선에서 우시지마(牛島) 사령관의 자결로 공식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90일의 전쟁은 당시 오키나와 인구 3분의 1에 가까운 15만 민간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인간 존엄 일깨우는 평화기념관

이 전쟁의 가장 큰 비극은 미군의 일본 본토 진격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본토 방위를 위한 시간벌기용이었다는 데 있다. 오키나와에 투입된 일본군이 전멸했고 그것은 이미 각오된 것이었지만, 본토방어를 위한 ‘옥쇄(玉碎)’가 오키나와 주민에게도 강요됐다는 점이 각별하다. 일본군 희생자의 배에 가까운 수의 주민들이 폭격, 기아, 말라리아 그리고 일본군에 의한 처형과 집단자결 등으로 죽어갔다.

1975년에 세워진 오키나와현 평화기념자료관은 인간의 존엄을 최상위에 두는 ‘오키나와의 마음’을 설립이념으로 한다. 민간인 희생자 수가 군 사상자를 훨씬 넘어서는 오키나와전의 특징은 우리에게 전쟁의 본질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다. 9·11 이래, 천안함 사건 이래 ‘정의’니 ‘응징’이니 하는 말을 주변에서 종종 듣곤 했다. 전쟁을 국가의 신성한 행위로 보는 인식은 우리 사회에 아직 강고하다. 국가와 국가,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추상적 수위로부터 좀처럼 구체적인 사실과 경험의 차원으로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불과 100년이 채 되지 않은 과거에 동족상잔의 처참함을 겪었던 우리에게 왜 전쟁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사색이 깊지 않을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전쟁을 기억하고 기념해온 방식과 관련 있을 것이다. 아무리 전쟁이 비극임을 알아도 전쟁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기 힘든 구조에서는 비극의 기억이 오히려 적대성을 재가동하고 증폭시킬 뿐이다.

평화기념자료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눈앞에 ‘평화의 주춧돌(平和の礎)’ 행렬이 소리 없이 펼쳐졌다. 군인, 민간인을 불문하고 국적에 관계없이 오키나와전쟁 중 희생당한 사람의 이름이 돌 위에 하나하나 새겨져 있었다. 마을 및 가족 단위로 기록돼 같은 성씨 아래 길게 늘어선 이름들은 일가족 몰살이 적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약 24만명의 명단 중엔 대한민국 365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82명의 이름도 있었다. 한 사람씩 발로 찾아다니며 호적을 확인하고 희생자의 이름을 찾아 기록하는 작업은 더디지만 아직도 진행 중이다.

전쟁 반성하는 곳으로 남겨져야

센카쿠 혹은 댜오위다오 영토분쟁으로 오키나와 해협이 또다시 불안하다. 아베 신조 총리는 ‘일본이 돌아왔다(Japan is Back)’는 제목의 워싱턴 연설에서 센카쿠 문제를 재이슈화해 중국 여론을 거칠게 자극했다. 오키나와에서 만난 한 현지 연구자는 미국과 일본이 오키나와 해협을 고의적으로 분쟁지역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으로서는 동아시아에서 발언권의 확보를 위해, 일본으로서는 ‘정상국가화’를 위해 오키나와 열도를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디, 전쟁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오키나와의 마음’이 소중히 지켜지기를, 그래서 지난 세기의 비극을 반성하고 사색하는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마음의 학교로 남겨지기를 바란다.

백지운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국민일보, 201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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