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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운] 재난영화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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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6-21 15:20 조회37,0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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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여름 극장가에 재난형 블록버스터들이 줄지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으레 이맘때면 재난영화가 성황이지만 요즘 재난서사 붐은 예사롭지 않다. 9·11이 준 공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세상을 또다시 경악케 한 3·11은 21세기를 대재앙에 대한 두려움으로 뒤덮기에 충분했다. 바야흐로 재난서사는 인간의 상상력과 결합할 수 있는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재난서사는 문명시대의 산물이다. 구약시대의 소돔과 고모라, 대홍수는 죄악으로 물든 세상을 정결케 하려는 신의 의지로 해석됐다. 그러나 대재앙의 원인을 신의 의지로 돌리기엔 과학기술이 너무 발달한 현대, 인간은 재앙 앞에 여전히 나약한 존재다. 예측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거대한 재앙에 대한 공포는 역설적으로 문명이 발달할수록 더 불가항력적이다. 재앙을 불러오는 것은 문명이며 궁극적으로는 바로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재난서사는 바로 인간의 마음속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으로부터 탄생되는 것이다.

재앙 불러오는 것은 결국 인간

그런 점에서 21세기 세계 강국으로 부상한 중국에 최근 등장한 ‘재난영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말 개봉한 펑샤오강의 야심작 ‘1942’가 그것이다. ‘집결호’ ‘야연’ ‘대지진’ 등 중국형 블록버스터로 국내에 알려진 펑샤오강은 장이머우를 이은 중국영화의 거장이다. 1990년대 로맨틱 코미디 영역을 개척해 ‘연말특수’라는 말을 유행시킬 만큼 그는 중국 자본주의와 호흡을 같이해 온 인물이다. 그런 그가 흥행을 기대하기 힘든 이 영화를 위해 당국과 신경전을 벌여가며 10년의 심혈을 쏟아부은 것이다.

재난영화라지만 ‘1942’엔 스펙터클이 없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압도적인 공포신도 없고 그것에 맞서는 영웅도 없으며 재난영화에 필수요소인 가족서사도 없다. 러닝타임 146분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전하는 메시지는 ‘1942년 허베이성(河北省)에 대기근이 일어나 300만명이 죽었다’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원작자는 신사실주의 작가 류전윈(劉震雲). 역사나 현실에 대한 거대서사를 유보하는 그의 건조한 다큐멘터리적 어법을 펑샤오강은 충실하게 스크린으로 옮겨왔다. 과장도, 비명도 없이, 적당한 보폭과 일상적 어조로 300만이 기근으로 죽은 사건을 덤덤하게 그려낸다.

그러다보니 ‘아니 300만이라고?’라고 반응하는 게 오히려 오버로 느껴질 정도다. 그 당시 그 정도 죽는 일은 부지기수였으며, 1942년에는 더 중요한 일-‘쑹메이링의 미국 방문’ ‘간디의 단식’ ‘스탈린그라드의 전투’ ‘처칠 수상의 감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1942년에 허베이성의 300만의 죽음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재난 아닌 재난이다.

덤덤하게 암흑의 핵심 건드려

펑샤오강의 이 특이한 재난서사는 일련의 연속성을 지닌 기획으로 보인다. 분명 ‘1942’는 ‘대지진’(2009), 더 나아가면 ‘집결호’(2006)와 연결선상에 있다. ‘대지진’은 76년 허베이성 탕산에서 24초간 일어난 지진을 다룬 영화다. 공식 집계로 사망자가 24만명이라지만 60만명이라는 말도 있다. 76년은 문화대혁명으로 정치투쟁이 온 나라를 뒤덮던 시기 아닌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주더(朱德) 등 ‘위대한’ 지도자들이 차례로 서거한 때이기도 했다. 대지진으로 죽은 탕산 주민의 진상은 그로부터 30년간 국가기밀로 분리돼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어쩌면 펑샤오강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암흑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는 듯하다. ‘1942’가 대약진 시기 300만을 기근으로 죽게 한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사실 핵심은 그보다 더 깊고 모호한 곳에 있다. 궁극적으로 역사를 만들고 기억하는 것은 당국이나 지도자 몇몇은 아니지 않은가.

백지운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국민일보, 201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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