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경]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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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6-24 16:26 조회28,14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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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북유럽으로 출장을 왔다. 듣던 대로, 아니 듣던 이상으로 물가는 어마어마하고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한국 사람 기준으로는 많은 것이 느리고 불편했다. 지인은 연휴에 다친 아이를 데리고 병원 응급실에 갔다가 여섯 시간을 기다렸다고 했다. 또한 사람 손이 한번 가면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가니, 외식은 값비싸고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남다르게 잘살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공공의료를 이용하고, 공공교통을 이용해서 공공도서관과 공원을 찾는 북유럽 사람들은 다소 불편이 따르더라도 공공이 아닌 것을 이용할 엄두를 못 내기도 하지만, 또 막상 그래야 할 필요도 별달리 못 느낀다고 하였다. 공공서비스에 개선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 비용은 시민들이 부담하는 것이므로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는 잘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도 했다. 그들에게 공공은 시민의 일상의 뼈대이며, 사회적 삶의 기본인 듯했다.
그런데 북유럽과는 달리 한국에서 공공에 대한 논의를 하다 보면 사실 제일 난감한 문제 중 하나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공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공공이 싸구려 선심에 불과하다고 기피하고, 어떤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라의 백성 되기를 강요하는 공간이라고 공공을 거부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방만한 경영으로 공공기관 종사자들의 배만 불리는 돈 먹는 하마라고 미움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공공이란 재빠른 누가 해먹기 좋은 눈먼 돈이어서는 안 된다. 사실 공공이 불편할 수도 있는 것은 공공이 각자의 욕망을 실현하는 공간이 아니라 삶에 꼭 필요한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공공의료도 시티(CT)건 엠아르아이(MRI)건 내가 답답하면 아무 때나 찍고, 원하면 내 마음대로 전문의도 만나고 고가 약도 처방받는 것이 아니라, 급하지 않으면 기다려야 하고, 전문의를 볼 사안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으면 내 돈을 내겠다고 해도 소용없는 것이 공공의료다.
대신 공공은 종교나 성적 지향과 정체성에 따라서, 또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서 차별받지 않는, 다시 말해 사적인 영역이 인정받는 공간이다. 또한 단지 비용의 문제를 넘어서, 특정한 개인이나 기업의 사적인 이해관계의 실현이 아니라 모두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공공이다. 사실 북유럽식의 복지라는 것도 결국 기본적인 필요를 보장해서 누리는 여유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달리 표현하면 기본적인 것 외의 것은 줄인 단순한 삶인 것이며 끝없는 경쟁으로 성공과 부를 몰아주는 것이 아니라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을 가능하면 대체로 비슷하게 누리고자 하는 사회원리이다. 따라서 공공이란 삶을 꾸려가는 다른 종류의 원리가 되어야지, 단지 비용의 배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마침 이 글을 쓰는 동안 공공서비스의 가격 인상을 둘러싼 브라질의 시위 소식이 들린다. 물론 가격이 문제겠지만, 브라질의 경우에도 가격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쉽게 삶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했지만 삶에서 필수적인 부분을 가려내는 격조도 사회마다 다를 것이며, 이를 착한 가격에 좋은 질로 제공하는 것 역시 어디서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우선은 지난 2001년 브라질에서 처음 열렸던 세계사회포럼이 내세우는 대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고 믿는 것, 이를 통해 우리가 모여서 살아가는 사회에 대하여 희망의 밑그림을 크게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 돈보다 생명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돈이 생명이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 사회가 돈을 벌고 쓰는 방식이나 돈을 쓰는 용처는 더욱 중요할 테니 말이다.
백영경 방송통신대 교수·문화인류학
(한겨레, 2013.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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