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 [명저 새로 읽기]앙리 르페브르 ‘리듬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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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7-01 17:19 조회24,2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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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오감을 활용한 자본주의 분석
“이 짧은 분량의 책이 목표하는 바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리듬들을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과학, 새로운 지식의 영역을 정초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그 속에 실천적 방안 역시 포함된다.”
이 사소하지 않은 목표를 자신의 책 서두에 놓는 야심가를 세상은 별로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진정으로 새로운 과학이나 지식을 제시하기란 ‘한줌의 귀재들’에게만 허용된 일일 터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이 목표를 내건 이가 90 평생을 일관되게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을 꿈꾸었고,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단 한번도 공산당에 의해 인증된 공식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한 적이 없는 인물이라면 그 책은 신뢰에 값하는 물건임에 틀림없다. 그 인물이란 바로 앙리 르페브르(1901~1991)이며, <리듬분석>(갈무리)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출간된 유작이다.
이 책에서 르페브르는 평생을 바쳐 전개했던 일상생활 분석을 통한 자본주의 비판을 ‘리듬’이란 방법적 시각을 통해 종합함으로써 새로운 과학·지식을 생산하려 했다. 그 기본적인 전제는 “장소와 시간, 에너지 소비의 상호작용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리듬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결국 자본주의의 생성과 유지를 공장이나 은행으로 좁혀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삼라만상을 관통하는 리듬 속에서 파악하자는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리듬이란 헤겔-마르크스적 역사관이 가정하는 진보주의적 시간관을 거부하는 동시에, 내용물을 채워 넣으면 되는 텅 빈 장소라는 정태적이고 기계적인 공간관을 비판하는 방법적 시각이 담긴 개념이다. 진보주의적 시간관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란 믿음 아래 자본주의 사회가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리라는 낙관주의나 단계론을 낳을 뿐만 아니라, 세 끼 밥을 먹는다거나 자고 일어난다거나 하는 인간 육체에 각인된 순환적 시간 감각을 세상에 대한 분석에서 배제하게끔 한다.
그래서 르페브르가 제안하는 리듬분석이란 방법은 시간과 공간을 선험 범주로 이해하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시공간이 인간의 육체와 에너지와 조우해 만들어내는 반복과 속도와 강도를 자본주의 분석의 기초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르페브르가 말하는 ‘새로운 과학·지식’인데, <리듬분석>은 이 과학의 기초적 입장이 담긴 매니페스토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구체적인 분석이란 측면에선 다소 아쉬운 면이 있지만, 기존의 자본주의 분석, 특히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의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란 면에서는 풍부한 상상과 날카로운 착상을 페이지마다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함의는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시공간관에 기초한 인식모델, 즉 근대과학이 특권화한 ‘주체-대상’이란 인식론적 모델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가 무의식 중에 인간에게 강요해 체제를 재생산하는 근원이란 비판이다. 즉 직선으로 흐르는 시간과 텅 빈 공간이 이미 인간에게 주어져 있기에 시공간은 결코 인위적 힘이 가해질 수 없다는 전제야말로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가 시공간의 배치와 구성을 통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과정을 못 보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리듬분석>은 선험적 시공간 속의 추상적 ‘보는 주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먹고 숨쉬고 놀고 늙어가는 구체적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오감의 주체’를 통한 자본주의 분석·비판의 언어를 주조하자는 프로젝트인 셈이다. 자신을 스펙, 즉 기계 사양으로 표상하기에 이른 이 땅의 자본주의적 삶을 근본에서 재검토하기 위해 <리듬분석>은 반드시 거쳐가야 할 ‘귀재’의 작품이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경향신문, 2013.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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