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 지그문트 바우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 회원칼럼·언론보도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회원로그인

회원칼럼·언론보도

[김항] 지그문트 바우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9-04 16:33 조회21,961회 댓글0건

본문

ㆍ홀로코스트는 이성·기술합리성의 산물


실로 오랜만에 읽는 내내 긴장감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이해의 끈을 조금이라도 놓으면 순식간에 무의미한 문장 더미가 정신을 급습하는 난해함 때문은 아니었다. 혹은 끔찍한 역사적 사건의 수많은 에피소드와 세세한 묘사가 마음을 뒤흔들어 감정의 통제를 불능상태로 만들기 때문도 아니었다. 논리는 더할 나위 없이 명쾌했으며, 서술의 리듬은 새벽녘의 거리처럼 차분하고도 어떤 예감으로 가득 찬 사려 깊은 것이었다.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다룬 지그문트 바우만의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새물결)를 읽은 일차적인 감상이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접했을 어마어마한 양의 자료와 저서들은 분명히 저자로 하여금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망스러운 비애에 몸서리를 치게 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우만은 1925년 태어난 폴란드 출신 유대인이며, 그 자신이 1960년대 말 폴란드 사회에 만연한 반유대주의로 인해 국적을 박탈당하고 추방으로 내몰린 이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즉 바우만은 홀로코스트를 동시대에 경험했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유럽을 지배하던 반유대주의를 몸소 체험했던 셈이다.


그럼에도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는 저 분노와 비애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홀로코스트와 마주하여 분노와 비애를 앞세워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역사의 정상적 흐름을 방해한 단절”이자 “문명사회라는 신체에 자란 암종”이며 “일시적 광기”로 치부해온 사회학자들을 힐난한다. 그는 그런 ‘주류’의 이해와 정반대로 홀로코스트를 “합리적인 현대사회에서, 우리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그리고 인류의 문화적 성취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태동해 실행되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그러한 사회와 문명과 문화의 문제”로 사고할 것을 촉구한다. 다시 말해 바우만에게 홀로코스트는 유럽 근대 문명·문화로부터의 일탈이 낳은 사건이 아니라, 그 문명·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이성과 기술합리성이 낳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럽 근대 문명·문화의 이성과 기술합리성은 홀로코스트를 가능케 했는가? “부헨발트(나치의 강제수용소 중 하나)는 디트로이트의 리버루지(포드자동차 공장 등이 있는 대규모 공업지구)만큼이나 우리 서양의 산물이다. 우리는 부헨발트를 본질적으로 제 정신인 서양 세계가 뜻밖에 일으킨 일시적 정신 이상으로 치부할 수 없다.” 바우만이 저서에서 인용한 이 문장이 그 답이다.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상하좌우의 전체적 기능구조를 담지하는 노동자는 도덕과 윤리를 물을 수 없는, 아니 물을 필요가 없는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홀로코스트를 지배한 것은 이 차갑고도 군더더기 없는 기술합리성이지 광기에 사로잡힌 악마의 심성이 아닌 셈이다.



바우만이 “홀로코스트를 현대사회의 숨은 가능성들을 검사하는 드문, 그러나 의미 있고 신뢰할 만한 시금석으로 간주할 것을 제안”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직 공포에만 의존해서 질서를 이끌어내려고 했다면 SS는 더 많은 병사와 돈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합리성이 더 효율적이었고 이것이 더 얻기 쉽고 값도 쌌다. 그리하여 그들을 없애기 위해 SS대원들은 주의 깊게 희생자들의 합리성을 배양했다.” 공포가 아니라 합리성, 이 끔찍한 현대적 통치의 핵심 원리는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살아 남아 인간 삶을 옥죄고 있다. 합리성은 비용이 덜 든다는 이점만을 통치 측에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극악무도한 사건의 집행자들에게 수치나 죄책감을 면죄해준다는 사실이며, 그것을 기억할 때에는 합리성의 바깥 사례로 비정성화하는 효과를 낳아 살아남은 자들의 도덕감정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근의 국가정보원 사태를 보는 모두의 시선, 특히 언론의 무감한 보도 행태야말로 이런 합리성의 통치가 한국 사회를 관통하고 있음을 증좌하고 있다. 그 대가는 아마도 상상도 못할 정도로 혹독할 것이기에, 바우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이 땅의 말하고 생각하는 이들은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1941년에는 홀로코스트를 예상할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불안한 이유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감히 배제하지 못한다.”


 

김항 |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경향신문, 2013. 8. 3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Segyo Institute.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TEL. 02-3143-2902 FAX. 02-3143-2903 E-Mail. segyo@segyo.org
04004 서울특별시 마포구 월드컵로12길 7 (서교동 475-34) 창비서교빌딩 2층 (사)세교연구소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